비둘기호

그 때의 위로

by 꿈꾸는 momo

무심코 책장 한 귀퉁이에서 오래된 일기장을 발견했다. 97년, 대한민국 고등학생으로 살던 나의 흔적들을 들춰보며 가여운 마음이 들었다. 습관처럼 몇 줄이라도 일기를 써야 잠을 잤던 나는, 처음 한두 장 말고는 빠르게 끼적인 필체로 일기를 마무리했다. 늘 비슷한 걱정, 다짐, 기도 같은, 별로 건질 게 없는 무의미한 글들이었다. 읽어볼 것도 없는 글들을 넘기다 유독 정성스런 필체로 쓴 일기가 눈에 띄었다. ‘비둘기호’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비둘기호


비둘기호 막차가 도착했다.

요란한 기적소리가 멈춘다.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에 떠밀려 손잡이도 없는 칸에 선다.


사람들이 떠든다.

낡은 선풍기가 돌아간다.


기차가 서고 사람들이 내리고

사람들이 탄다.


사람들의 손에, 발밑에 짐이 많다.

내 등에도 읽지 않을 책이 한 짐이다.


채소 장사 할머니가

때 묻은 지폐 한 장과 채소 한 봉지를 바꾼다.


기차가 서고 사람들이 내린다.

빈자리가 많다.


창밖에 어둠이 깔린다.

하루살이들이 창에 부딪힌다.


지친 할아버지가 긴 의자에 눕는다.

밤은 깊어가고 기차는 달린다.


이제는 달리지 않는 비둘기호가 다시 내게로 멈춰 선 듯하다. 어른이 되는 게 까마득하게 느껴졌던 그 시절의 내가 오히려 까마득하다니, 세월이 참 많이도 흘렀다.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를 다녔다. 주말마다 집을 다녀오는 친구도 있었지만 나는 자주 학교에 남아 있었다. 과외나 학원에 기댈 형편이 아니었기에 매달 받아보던 학습지라도 밀리지 않게 풀어야 했고, 그런 내게 시간은 늘 부족했다. 나라는 존재가 성적과 순위로 대변되던 때였다. 그러다 가끔, 집에 가는 날이 유일한 안식일이었다.

시골집은 멀었다. 해가 밝을 때 도착하는 버스를 타려면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토요일 수업이 있었던 때였다. 시외버스 정류장에 가는 택시를 선점하지 못하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아싸리 좀 늦게 출발해도 기차가 훨씬 편했다. 집에 가는 길만큼은 시간에 쫓기기 싫었다. 게다가 비둘기호는 무엇보다 저렴하지 않은가.

내가 이용했던 시간대 비둘기호는 지하철 좌석처럼 길게 뻗은 의자가 마주보게 놓여 있었다. 탑승인원 제한도, 지정석도 없던 주말의 비둘기호는 언제나 만원이었다. 먼저 줄을 서봐야 앉을 자리는 없었고, 입석 손잡이라도 차지하면 다행이었다. 도시를 지날 때까지는 기차의 움직임을 온몸으로 느끼며 버텨야 했다. 도시를 벗어나면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고 나면 그제야 빈자리가 생겼다. 다리는 퉁퉁 부었고 어깨는 무거웠다. 읽지도 않을 책을 지고 다니던 불안한 나의 열여섯 살. 보따리 짐이 가득한 노인들의 고단함마저 나보다 나아 보였고, 죽을 줄도 모르고 차창으로 달려드는 하루살이들이 나 같을까 생각했다. 곧 정차할 역을 알리는 기관사의 방송이 나오고 좌석에서 일어설 때쯤이면 이미 어스름한 저녁이었다. 속도를 줄이며 쉭쉭 거리는 기차에서 넘어질까 봐 손잡이를 꼭 잡을라치면 내가 삶에서 부여잡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참으로 어려운 마음이었다. 하지만 열차에서 승강장에 내리는 순간 마음이 놓였다. 내리는 사람은 별로 없어도 노란 가로등 아래로 수많은 날벌레들이 윙윙 거리며 반겨주었고 저 멀리 목을 빼고 기다리는 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땀이 배어 너덜해진 승차권을 반납함에 넣고 개찰구를 지나면 아버지는 역 앞에 세워둔 오토바이에 시동을 거셨다. “왔나. 어서 가자.” 아버지 냄새를 느끼며 허리를 붙잡았다. 밥 짓는 냄새가 넘실대는 시골의 저녁, 어머니가 해 놓은 밥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된장국에 돼지 두루치기 한 접시였지만 남은 양념에 밥을 비벼 밥 한 공기를 싹 비워내곤 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또 짐을 챙기고 있을 딸을 안쓰럽게 바라볼 뿐 두 분은 항상 말이 없으셨다. 먹고 살기 바빠 제대로 지원해주지 못하는 집안형편을 두고 딸에게 못내 미안해서였을 것이다. 나는 두 분이 학교생활도, 성적도 묻지 않아 좋았다. 아무 것도 아닌 채로 살다가 왔지만 그래도 나는 이 집의 딸이라는 사실이 느껴져 좋았다.

다음 날이 되면 아버지는 무심한 얼굴로 기차역까지 다시 날 바래주셨다. 그리고는 역 앞 빵 가게에 들러 내가 좋아하는 크림빵을 한 봉지 사서 내미셨다. 그게 아버지가 건네는 마음이었다. 투박하고 촌스러운 비둘기호를 닮았다. 그래서 비둘기호가 편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열어젖힌 창문 사이로 휘 들어오던 끈적한 바람이, 달달 거리던 선풍기가, 소란스러운 객실 안의 풍경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제는 볼 수 없지만 비둘기호는 내 기억 속에 그대로 애틋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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