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러 온 줄 알았던 내 손이 부끄러웠다
그 길은 험했다. 야간 침대 버스는 처음이라 설렜던 마음도 잠시, 27시간의 여정은 무료했다가 불안했다. 이 버스는 더친(德钦)현까지 우리를 실어나를 터였다. 더친에 도착해서도 목적지인 불산마을까지는 몇 시간을 더 가야한다. 시내를 빠져 평탄한 도로를 달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주변이 어둡다. 칠흙같다. 눈을 깜빡거려 보지만 아무것도 안 보인다. 버스의 전조등이 비추는 전방 몇 미터의 길이 빠르게 감기듯 지나간다. 언젠가 가상 공간에서 레이싱을 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싸우는 듯한 중국어 대화가 드문 드문 들렸다. 소리의 거리감으로 짐작했을 때, 내 뒤쪽으로 제법 많은 자리가 있나보다. 버스 안은 좁은 통로를 사이에 두고 세 줄의 침대가 2층으로 뻗어 있었다. 딱 성인 한명이 누울만큼의 공간이었다. 침대 공간을 분리해주는 가림막 때문에 시야가 좁아 답답했지만 그래도 운전사와 조수석이 보이는 앞쪽 중간쯤이 내 자리였다. 운전석 주변에는 그가 까먹고 버린 씨앗껍질들이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었다. 중국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는 언제나 해바라기 씨 껍질로 가득하다. 언젠가 그들이 능숙한 솜씨로 껍질을 까내는 걸 보며 놀라워 한 적이 있는데, 종종 앞니 사이가 벌어진 이들의 이유가 이것 때문임을 알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 분명 저 운전사의 앞니도 삐쭉 벌어져 있을거야. 좁고 어두운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결국 눈을 감았다. 그러다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내가 어느 절벽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관찰자 시점에서 떨어지는 나를 보고 있는데 가속을 못 이기는 심장의 감각은 생생해서 숨통이 터질 듯 아찔했다. 눈을 떴다. 내 두 손은 침대 양 모서리를 움켜쥔 채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가파른 곳을 올라가고 있는 모양이다. 날이 밝을 무렵이었다. 비포장 도로를 달리나. 두리번 거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비포장 도로 수준이 아니었다. 가드레일도 없는 좁은 산길을 오르는 중이었다. 옆은 천 길 낭떠러지였다. 멀찍이, 수목이 없는 빈둥산들이 어마한 규모로 솟아 올라 있었는데 앞 산의 중턱쯤 시선이 닿아있으니 그만큼의 고지에 올라 있었던 거다. 여기서 버스가 추락해도 중국에선 기사화 되진 않을거야. 아마 찾지도 못할걸. 관심도 없을거고. 깨어 있던 일행 한 명이 말을 꺼냈다. 심하게 흔들거리는 버스의 움직임에 잔뜩 긴장했다. 그 와중에 휴대폰을 들고 낄낄대며 운전을 하고 있는 운전사가 눈에 들어왔다. 목구멍까지 욕이 올라 왔지만, 여긴 중국이다.
쿤밍(昆明, Kunming)에는 이번이 네 번째 걸음이다. 종종 겨울방학을 이용해 쿤밍에 있는 한국인 국제학교로 교육봉사를 다녀왔다. 그런데 이번엔 우리나라 아이들이 아닌, 현지 아이들을 대상으로 수업할 기회가 주어졌다. 쿤밍을 벗어나 더친, 샹그리라를 지나 티벳족들이 사는 불산마을로 간다. 고생할 것을 뻔히 알면서 기회라 표현한 것은 이십대 마지막을 달리는 내 청춘의 섣부른 의미부여였을까. 제3세계로 봉사활동을 하러 떠나는 선한 그림을 상상했다. 게다가 운남의 절경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그런 내게 해발 3000미터가 넘는 고산지대의 길은 시작부터 절대 호의적이지 않았다. 말과 야크를 끌고 차마고도(茶馬古道)를 걷던 마방(馬幇)들에게도 그랬을까. 아름답고도 장엄하나 험하고 고단했다. 만 이틀이 걸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위액까지 쏟아내 탈진상태나 다름 없었다.
땅을 밟으니 정신이 돌아왔다. 이 곳은 중국 변두리 중의 변두리다. 독립된 나라를 꿈꾸던 티벳족의 피빛 역사가 아픔으로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족들이 여전히 이곳을 감시하고 차별해서 발전도 더디다고 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어지는 대륙의 빌딩은 애초에 찾아보기 힘들었고 낡고 낮은 가옥들이 드문드문 모여사는 시골 마을이었다. 벌거숭이 산들이 거대한 협곡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이 숭배하고 의지 할 것이 오로지 자연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이해되었다. 삼킬 듯 서 있는 산들과 흐르는 강, 그리고 높은 하늘이 주는 장엄함이 있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진 직후였다. 식당인 듯 보이는 건물에만 붉은 조명이 켜져 있었고 온 동네가 깜깜했다. 말리느라 걸어놓은 고깃덩어리가 주렁주렁 처마 끝에 매달려 우리를 반겼다. 대여섯 명의 불산학교 교사들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축배의 노래로 우리를 환대했다. 우리를 이 곳까지 초대해준 장웨이(가명)만이 유일한 여자교사였다. 그녀는 도시에서 유학생활을 하다가 초등교사가 된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떠나는 것에 실패한 사람들이 남아 있다는 이 곳에 다시 돌아온 이유가 뭘까. 그녀가 궁금했다. 안경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두 눈은 힘이 있었다.
이틀동안 두 개의 학교를 방문했다. 불산마을의 중심학교와 그 분교였다. 복도식 건물, 떨리는 마음으로 교실 안으로 들어섰다가 1분도 참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 나왔다. 고약한 냄새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들어갔다. 냄새에 익숙해졌을 즈음, 20명 남짓의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검게 그을린 얼굴들은 거칠게 터 있었다. 씻을 물도 없겠지만 두꺼운 각질이야말로 강한 태양빛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이란다. 영양상태가 나빠 보이는 아이들의 머리에는 원형탈모가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의 눈빛만큼은 수정처럼 맑았다. 어쩜 이리도 빛나는 눈동자들이 있단 말인가. 아이들이 나를 향해 뿜어내는 호감과 긍정의 에너지는 모든 피곤을 잊게 만들었다. 두 시간 수업을 했다. 다양한 종이로 여러 형태의 책을 만드는 활동이었다. 그 당시 내가 관심을 가졌던 분야이기도 했지만 쉽고 재미있게 결과물을 얻을 수 있으니 특별수업으론 괜찮겠다 싶었다. 많은 통역이 필요없기도 해서 별 고민없이 선택한 활동이었다. 알록달록한 색종이들은 어두운 공간의 채도를 바꿔놓았다. 때묻은 아이들의 손이 색종이의 화려함과 대조되었다.
그 이튿날도 같은 수업을 준비해 분교로 이동했다. 차를 타고 두 시간을 더 들어가야 했다. 차가 지날 때마다 뿌연 흙먼지가 이는 길을 달리다 어느 언덕 아래에 멈췄다. 산 너머 구석구석에서 모인 아이들이 기숙을 하는 학교라고 했다. 학교로 올라가는 길에 서른 명 안팎의 아이들이 우리를 환영하기 위해 줄 지어 있었다. 아이들은 상기된 얼굴로 우리가 지나가는 동안 꽃을 흔들었다. 어릴 적, 상여 꽃으로 보았던 종이꽃들이다. 발을 뗄때마다 뿌연 먼지가 일었다. 흙먼지 속에서도 꽃을 흔들고 섰는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외국인 교사들의 방문이 이들에겐 특별한 날이었던지, 마을 사람들이 학교 운동장에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불산학교보다 교육환경과 시설이 훨씬 열악했다. 수업을 하는 동안 열린 창문틀에 기대어 구경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환경과 체제, 이념과는 상관없이 아이들의 웃는 모습은 동일하게 아름다웠다. 모든 수업이 끝난 후 학교의 계단에 모여 단체사진을 찍었다. 2008년, 1월. 그들의 사진첩에도 끼워져 있을 외국인 교사들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을까.
아이들과의 짧은 만남을 마치고 현지 교사들과 함께 모였다. 선진교육 연수라는 목적아래 한 분이 협동학습 강의를 했다. 한국 교사들과 다름없이 즐겁게 배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들에게 도움이 된 것 같아 뿌듯했다.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인사를 나눌 시간이 되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장웨이가 입을 열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나 보다. 먼 곳까지 와주신 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선생님들의 수업을 보며 저는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여기는 모든게 넉넉하지 않습니다. 흰 종이조차 구하기 힘듭니다. 여러가지 색의 종이는 물론이고, 인쇄기도 없습니다. 선생님들이 가져 오신 여러가지 재료들이 낯설기만 합니다. 아이들에게 계속 적용할 수 없는 교육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의문입니다. 예상치 못했다.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보며 내 마음이 일렁였다. 내 수업을 두고 하는 말인것 같아 더 그랬다. 내 눈에는 색종이를 접는 아이들의 거친 손이 그저 안쓰럽게 보일 뿐이었는데, 그녀는 색종이를 만지며 느꼈을 아이들의 마음까지 읽은 것같다.
그 곳에서의 마지막 날 밤, 나는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녀의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 날 밤은 마을 숙소가 아닌, 그녀의 집에서 묵기도 했기 때문이다. 저녁을 먹고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 민족이 꿈꾸는 독립에 대해서도 들었다. 그녀가 도시를 떠나 이 곳으로 다시 온 이유도 들었다. 그들의 상황과 고민, 필요를 꼼꼼하게 살펴보지 못한 것이 참으로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문명의 눈으로 바라본 이기적인 내 마음이, 그들에게 좋은 것을 주러 왔다는 내 손이 부끄러웠다.
화장실도 없는 그 곳. 그 날 밤 나는 다시는 볼 수 없는 황홀한 달빛 아래서 똥을 누었다. 어쩌면 문명이란 이름으로 그들의 아름다움에 똥칠을 한 건 아닌가 마음이 복잡했다. 주러 간 길이라 생각했는데 무거운 것을 안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