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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력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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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ngco
Feb 7. 2020
1971년 국내에는 체력장이라는 것이 도입되어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체력장이 생긴 이유는 '체력은 국력'이라 해서 학생들의 체력이 좋아져야 미래의 국력도 좋아진다는 논리였을 것이다.
방학을 제외하고 학교에 책가방을 가지고 가지 않는 날이 두 번 있었다.
바로 체력장 하는 날과 운동회였다.
운동을 좋아했던 필자로서는 그날만큼은 최우수선수였다.
체력장 종목은 100m. 제자리멀리 뛰기. 윗몸일으키기. 공던지기. 왕복 달리기. 오래 달리기였다고 기억한다.
필자가 중학교 때는 88 서울 올림픽을 유치하여 올림픽 꿈나무를 선발하기 위해서 체력장에서 우수한자와 각 종목별로 우수한 청소년 선수를 선발해서 국가에서 관리하여 88 서울 올림픽에서 상위 입상을 하기 위한 프로젝트 이기도 했다.
배드민턴 선수였던 필자는 당시 중학생 치고는 조금 더 체격이 좋았다. 선수였기에 그만큼 운동을 더 했기에 그랫을수는 있지만 일반학생들이 감히 쉽게 말을 걸지 못할 만큼 상당한 위압감이 있었다.
그러나 같은 반 학우들에게는 더없이 다정한 친구였다.
그 이유는 운동회를 우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발 된 친구들을 훈련시키고 단결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체력장의 성적은 학교의 지배 서열을 가리는 자리도 되었다.
보통 주먹질 좀 하는 친구들은 반드시 운동을 하거나 따로 복싱이나 태권도 등 무술로 체력을 단련해 나름 자신이 체력장에서도 학교에서 가장 잘해야 한다는 생각들이 많았다.
그래서 체력장 두세 달 전부터 체력장을 대비한 특훈을 방과 후에 실시하기도 했다.
그때는 체력장이 등급이 매겨져 고등학교나 대학에 들어갈 때 점수로 어어지기도 했을 때이다.
당시 필자가 알기로 중학교 1~2학년(3학년 제외)이 전국에서 23만 명이 체력장을 봤다고 기억한다.
그 기억을 왜 하는가는 뒤에 언급하겠다.
체력장을 하는 날이면 당시 경쟁자들 사이에 알게 모르게 정보를 접수하고 파악하기까지 했다.
누가 윗몸일으키기를 몇 개 했더라. 던지기를 몇 개 했더라 등으로 그보다도 더 던지고 하고 기록을 넘어서려고 엄청 신경전을 벌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필자의 경우는 이미 1학년 때 3학년 상위 수준의 기량으로 체력장을 보았기에 체육실에서도 상당한 관심들이 있었고 학교 전체에서 필자가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가장 큰 이슈는 던지기였는데 던지기의 만점이 65m였다.
좀 던진다는 애들이 온갖 준비를 동작을 해서 던질 때 필자는 정말이지 제자리에서 팔로만으로 68m를 던져버렸다.
이게 최대 이슈가 되어 선생님들도 놀라고 친구들이 놀라서 끝남과 동시에 학교 전체에 소문이 났다.
괴물이 탄생했다고 ~~
나름 굉장히 우쭐했지만 운동부는 늘 감독님과 코치님. 선배들이 꽉 잡아두고 있기 때문에 우쭐대고 다닐 수 없었다.
조금만 이상한 말이 퍼지면 가차 없이 부실에 집합하여 팟다를 심하게 맞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2학년 9월 체력장이 돌아왔다.
이제는 3학년 선배들도 졸업을 앞두고 크게 후배들을 터치하지 않고 나름 대회에 나가서 성적을 올리니 차츰 필자에게 시비를 걸거나 선배들의 터치도 줄어들었다.
바로 경기력에서 선배들을 앞도 하다 보니 자연 선배들도 조심스러워졌을 것이다.
2학년 체력장은 더 치열하다.
3학년이 졸업을 준비하는 동안 학교의 짱이 되어야 하기에 여름방학을 지나고 2학기가 시작되면서 곳곳에서 싸움들이 있었다.
자신들이 학교의 짱이 되기 위한 기싸움들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싸움 한번 하지 않았다.
이미 각종 대회에서 상당한 입상을 하다 보니 매주 월요일 조회 때만 되면 상을 받으러 단상으로 올라갔던 기억이 있다.
그러다 보니 감히 주변에서 싸움을 걸어오는 애들이 없었다.
그렇게 9월 28일에 체력장을 실시했다.
예상대로 치열한 견제와 눈치로 경쟁상대를 이겨야 한다는 것이 자신들이 3학년 때 학교의 짱이 되는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필자가 1학년 때 팔로만 던진 68m는 1년 뒤 얼마나 더 던질까도 관심거리였다.
필자는 그때 전종목에서 올 만점을 했다.
던지기는 두번을 던지는데 첫 번째 재자리에서 팔로만 71m를 던졌고 두 번째 도움받기를 해서 84m를 던져버렸다.
학교에서도 난리가 났다.
야구선수도 중학교 때는 그만큼 못 던진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당시 그만큼 던졌다.
올 만점은 전국에서 5명이 나왔다고 들었다. 그때 체육선생님께서 전국 23만 명 1~2학년 중에서 올 만점이 딱 5명 나왔다고 말씀해 주셔서 알게 되었다.
올 만점의 여파로 88 꿈나무로 선발되어 6차 선발까지 가서는 대회 참가로 인해 멈춰버렸다.
그러나 필자는 88 꿈나무는 중도 포기했지만 88 서울 올림픽 은 국가대표로 태극기를 달고 참가했다.
체력장의 추억은 참으로 아련하다.
3학년 때는 선도부장이 아니었음에도 늘 체육선생님과 교문 앞에서 학생들의 복장을 검사하고 교실마다 다니면서 껄렁껄렁하는 친구들을 잡는 등의 활동을 했다.
학교에서도 필자에게만큼은 선생님들이 인정했다는 생각이 든다.
체력장을 생각하면 그때의 추억으로 지금도 미소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동창회를 가면 필자는 대부분 모르는데(친했던 친구들은 제외) 동창들은 모두 지금도 나를 기억한다.
지금도 만날 때마다 철 모르고 날뛰었던 나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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