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백해지고 싶다.

희망사항

by 은원


깜빡거리는 신호등. 저녁이면 어김없이 켜지는 네온사인.11월이면 찾아오는 수능.가을뒤엔 겨울. 1년이란 시간 속에 수없이 많이 스며든 기념일들. 규칙적으로 이런것들이 의미없이 지나간다. 그렇게 우리는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시간 속에 살아가나 보다.




저녁 10시가 넘어서 까톡이 왔다. 그 까톡을 보는 순간. 내가 오늘 무엇을 할 줄 알고 이 시간에 까톡을 보낸것인가? 배려심 없이 느껴진 불청객 같은 까톡을 무시하려던 찰나. 여느 때와 달리 글자 속에 느껴진 친구의 말을 무시 할 수가 없어 차가워진 공기 사이를 터벅터벅 걸어 나갔다.


남자들의 3대고민(취직,장가,연애)이 셋 중 하나인 오늘의 이야기 주제는 "연애"였다. 장난기 가득하며 말을 쉽게 내뱉었던 그 녀석의 얼굴은 한없이 가라앉아있었다. 이런 모습도 이 친구에게 있구나하며 무슨 이야기를 해줘야할까 했지만 아무 말 하지말고 자기 이야기만 들어달라던 친구에게 잠시 동안 나를 맡겼다.


그녀석의 마음을 휘저은 주인공은 우리보다 1살이 많으며, 애교가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나처럼 외로웠던 그녀석은 그녀가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는 말에 공감할 수 있었다. 좋아한다. 사랑한다. 보고싶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서로에게 했었지만 친구끼리 쉽게 내뱉는 말인지. 이성으로 바라보는지 고민이였다.


그녀를 처음만났을 때, 무엇을 해주었는지를 1시간 가량 듣고난 뒤 그녀석은 나의 대답 한마디 듣지 않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되물었다.


"너는 어때"


나는 어땠을까. 연애를 했을때 어땠을까. 한번쯤 나에게도 묻는 물음이다. 살면서 수많은 얼굴들을 보며 살아가지만 정작 자신의 얼굴 한 번 실제로 보지 못하고 우리는 떠나간다. 어쩌면 우리의 지금의 모습은 전생에 자신이 가장 싫어한 사람의 얼굴의 탈을 씌워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는 선물을 받았다. 가장 싫은 사람의 모습을 보지 않을 수 있는 선물.그런 나는 연애할때 모습 역시 실제로 보지 못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한 일. 그녀를 맹목적으로 사랑하기 위한 행동들이 그녀에게로 이어졌다면 지금의 나는 솔로가 아니었겠지란 답도 없는 고민의 결론은 "남자"라는 동물로 태어난 것에 대한 원망이였다. 아직은 유치하기에 여자도 남자만큼 힘들기를 바랬다.


"연애?"


지금의 나는 어떠한 인간관계도 만들기 싫었다. 그러기에 연애 또한 사치라 생각한다. 불안정한 나에게 다가온 관계를 지킬 자신이 없었기에 그러므로 헤어져야하기에. 이별은 여전히 뼈아프기에.


그녀석은 자책했다. 만나볼 만큼 만나봤다고 생각했지만 여자에게 매달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 또한 하지 못한 말을 했다.


"나이 먹어가면서 인간관계는 머리 쓰는 것보다 마음 쓰는 게 좋더라. 마음을 쓰면 쓸수록

뭐랄까? 사람이 담백해지는것 같아. 난 담백한 사람이 좋아.솔직히 말해봐."


영화"건축학개론"에서 첫사랑의 추억과 함께 덤으로 얻게 된 한가지의 문구이다.안에 무엇이 들어간지 모르겠지만 맵기만 해서 붙은 이름 "매운탕" . 매운탕을 보며 여자주인공은 자신과 같다고 했다. 자신이 맵기만해서 아프다고. 그때부터였을거다 내가 시시해지고 싶었던 것이 말이다.


26살 11월. 우리의 겨울은 아직도 맵다.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해 사랑을 사랑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애써 자존심에 아픈 것을 담백하게 애기하지 못하며 견디지 못할 슬픔에 속시원하게 울지 못한다.여전히 그녀석과 나는 자신한테 무엇이 들었는지 알지 못한채 그저 맵기만 했던 오늘의 하루가 지나갔다.


몇걸음 이면 만날 수 있는 친구이지만 전화마저도 쉬운 일이 아니게 된 우리. 가까운 만큼 약속을 정하지 않고 만나기에 언제 만날지는 모르겠지만. 다음번에 만날땐 나도 그녀석도 조금은 담백해지기를 바란다.


그렇게 나와 다르지 않은 친구의 보통의 하루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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