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을 견뎌내기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이다.
- 장 폴 사르트르
흠 그래 이건 뭐랄까? 소설을 쓸까? 에세이를 쓸까? 시나리오를 쓸까? 1년을 고민했어. 그 1년을 고민하는 동안 말랑 말랑한 두 손으로 그 어떠한 것도 토해내지 못했지만 말이야. 내가 말이야 오늘 아침에 무엇을 하겠다고 가정을 했어. 음 자세하게 예를 들어보자면 폐인처럼 하는 게임을 관두기로 했어. 매일 10시간 동안 미친 듯이 했지. 그렇게 게임을 잘하게 되었고, 대회에서 1등도 하게 되었지. 그 날 친구에게 1등을 했다고 자랑을 하니 들려오는 답은 "게임폐인"이었지. 그래서 난 게임을 관두고 고민만 한 채 넣어두었던 글을 다시 끄집어내었어. 그럼 이제 난 오타쿠인가? 둘 다 철없긴 매 한 가지니..
갈 곳 있는 사람들이 모두 떠난 오후 12시. 갈 곳 없는 사람들로 메마른 길이 가득해졌어. 그 길 위에서 B를 기다렸지. 이 날 B는 모기업 K의 합격소식을 기다렸고, 먼저 도착한 나는 B를 기다리게 되었지. 조금 뒤 도착할 B에게 뭐라고 먼저 말을 걸까? 고민하면서 B에 대한 기억을 돌아보게 되었지. 어쩌면 누군가를 먼저와 기다린다는 것은 작은 인간관계의 작은 쪽지 시험과 같은 거일지도 몰라.
내가 생각하는 B는 "시험 괴물"이었어. 그가 치르는 시험들은 점점 더 잔인해져 갔지. 처음은 우수미 양가. 그다음은 등급과의 싸움, 숨 쉴틈 없이 시작된 알파벳들과의 싸움. 이제는 PASS와 UnFail. 들어가거나 포기하지 않거나의 싸움을 치르는 중이었지.
국밥을 먹기로 했지만, 예상보다 더운 날씨 덕에 나와 B는 국수를 먹었지. 메뉴판은 먹음직스럽고 큼지막한 그림들을 뒤로하고 능청스럽게 가격을 보며 주문하는 거에 익숙해져 버린 나와 B. 식사만 하고 집으로 되돌아오려고 했지만 B가 계산하는 덕에 커피값을 계산하기 위해 커피를 마시러 5분 거리의 "단골 카페"에 들어섰지.
"녹차 프라푸치노와 아이스 아메리카노" 8500원. 사람이 가난해지면 얄팍해지는 건 한순간인 게. 계산을 하면서도 방금 식사가 만 사천 원이니 이득이구나란 생각이 들더라. 그렇게 테이블 위에는 B의 노트북과 아메리카노. 녹차 프라푸치노와 녹색 커버의 책이 자리 잡게 되었지.
선택권을 쥐고 있는 건 짜릿한 일이었어.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프라푸치노를 목에 넘기면서 책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읽을까? 말까?라는 선택권을 쥐었으니 말이야. 책을 이리저리 돌려가면 읽을까? 말까? 고민을 하던 중 B의 아메리카노가 천천히 줄어드는 속도에 맞추어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지.
오후 2시의 동네 카페에는 항상 같은 등장인물들이 등장해. 고독함을 해소하려는 노부부. 언어를 소비하려는 주부들. 점심을 소화하려는 직장인들.. 여기엔 커피를 소비하려고 자리 잡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이 시간 카페는 늘 북적이면서도 고요했지. 누가 먼저 소비시키는지 경쟁을 하는 것처럼 말이야.
그 틈에서 홀로 무엇을 소비하려고 했을까? 욕망을 소비했을까? 추억을 소비했을까? 어쩌면 창문에 비추는 햇살을 소비했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니 카페에서 나는 보통을 소비했을 것이다. 어제와 오늘이 닮았으니.
집으로 돌아오는 길. 느닷없이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B에게 눈치 없이 되물었다.
"떨어진 거야?'
"스터디 열심히 하려고.."
B가 면접에 떨어진 게 왜 웃기는지 모르겠지만. B와는 길에서 덤 앤 더머처럼 생각 없이 웃었어. 그렇게 우리는 아직 갈 곳 찾는 사람으로 남게 되었지. 친구의 대답에 "안도"한 나 자신은 알고 있었어. B도 언젠간 나의 곁을 떠나갈 것이라고. 하지만 그게 지금이 아니란 거에 신에게 고마웠어.
B와 오늘을 헤어지고, 여전히 난 아직도 보통과 싸우고 있어. 귀 속에 들려오는 수많은 텍스트. 내 손으로 적힌 수많은 텍스트. 무엇을 쓰고 있는가?를 수없이 고민하지만 답이 내려지지 않는 걸 보니 여태껏 답도 없는 고민을 한 게 분명해.
실패와 성공. PASS와 unfail. 1등급과 9등급 따위는 앞으로도 없을 것 같은 보통의 하루가 오늘도 지나갔네.
B의 포부를 들어보니 이제는 B도 내 곁을 떠나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네. 혼자만의 싸움이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혼자가 되려니 조금은 겁이 난다.
집으로 돌아와 TV를 켜니 오늘의 역사가 나왔다. 어떤 아무개는 노벨상을 받았고, 또 어떠한 아무개는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 포스트시즌의 첫 경기 선발투수가 되었고. 다른 아무개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오늘의 나라는 아무개는 보통을 견뎌냈다. 인생의 수많은 선택중 오늘의 선택은 어떠한 아무개로 남게 될까?
평범하지만 나와 같은 아무개들이 더욱 많을 것이란 위안을 삼으며 지금을 견뎌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