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스트 신영인의 에세이 '병속의 바다' 전문
"기억은 반복을 통해서가 아니라 영영 소멸한 순간에 가장 선명하다."
-롤랑 바르트 『밝은 방』
병 속의 바다에는 파도가 없다. 그곳은 달의 당김이 미치지 못하는 곳, 시간의 바깥이다. 우리는 그 안에 한 세계를 넣고 싶어 하지만, 병 속의 물은 다시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바다를 마주하면 반짝이지만 쉽게 흩어지는 장면 하나를 꺼내 쥐게 된다.
십 년 만에 다시 걷는 통영 골목이었다. 바다는 여전했고, 나도 여전했지만, 그 속에서 어떤 빛은 더 천천히 움직였다. 내 옆엔 작은 발소리가 하나 더 있었다. 전에는 없던 이름, 없던 표정, 없던 물음들. 파도의 말에 먼저 귀를 기울인 쪽은 내가 아니었다.
열 살이 된 아이와 함께 수산시장 골목을 걷던 중이었다. 소금 바람에 오래 그을린 시장의 얼굴 위로는 생활의 윤기가 돌았다. 한 평도 안 되는 자리에 쪼그려 앉은 의자, 바닷물을 흘려 넣어 만든 고무통 수조 앞에는 소쿠리마다 바다가 펄펄 살아 있다. 그 틈에서 무언가 털썩 떨어졌다. 작은 문어 한 마리가 바닥을 가로질러 기어 다니고 있었다.
"엄마, 얘 너무 작은데 어떻게하죠?"
아이는 문어를 맨손으로 들었다.
"원래 있던 데로 돌려줘야지."
팔을 비틀며 손에 매달리는 문어를 아이는 조심스레 다시 소쿠리에 넣었다. 시장을 도는 동안 아이는 문어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엄마, 문어가 기어 나갈까요? 대신 나는 물었다. 바다를 병에 담을 수 있을까? 어쩌면 그 물음은 나와 생활의 바다에서 우리는 다시 문어에 물음을 쥐고 섰다. 시장을 나오기 직전, 뭔가에 붙들린 듯 걸음을 멈췄다.
"엄마, 문어 한 마리만 살 수 있어요?
…살려주고 싶어요."
다시 만난 아주머니는 반갑게 웃었다.
"한 소쿠리에 삼만 원이니, 한 마리는 오천 원이다. 근데 아이야, 이걸 누구 코에 붙일라카노."
우리는 바다에 놓아주려 한다고 말했다. 아주머니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에고야, 그럼 그냥 가져가라. 문어야! 가서 잘 살그레이!"
봉지 안에 바닷물이 찰랑거렸고, 문어가 담겼다. 그 순간, 시장이 모두 우리 쪽을 향했다. 생선을 다듬던 손이 멈추고, 여기저기서 인사가 들려왔다.
"잘 가 그레이."
사람들은 함께 웃었고, 아이는 모자가 벗겨지도록 고개를 숙였다.
우리는 갯바위 아래로 조금 더 걸었다. 아이의 손에는 봉지 하나가 들려 있었다. 아이의 입에서 문어의 이름이 나왔다. 문숙이.
"문숙아, 이제 진짜 바다야."
난바다에서 고무통 바다로, 수산시장 바닥에서 아이의 손에 들려 다시 원래의 바다로. 이 어린 문어에게 어떤 시간이 남아 있었을까.
거의 도착했을 즈음 봉지에서 쫙 소리가 들렸다. 먹물이었다. 문숙이가 위기를 느꼈는지, 봉지를 향해 마지막 방어를 펼쳤다. 아이의 발걸음이 급해졌다. 넘어질 듯 달려 도착한 바다에서 꺼낸 문숙이는 자기 먹물 속에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손 위에서 축 늘어진 문어의 작은 눈이 휠 돌아갔다. 아이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문숙이를 바다에 놓았다. 빨판이 아이 손을 조금 잡았고 눈이 한 번 더 돌아간 뒤로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파도가 조용히 그녀를 덮었다.
목마른 나에게 바다를 주지는 말라고, 바람이 실어 나른 소금 알갱이 하나에서 바다의 길을 찾으라고 노래한 시인이 있다.
다만 하나의 암시, 이슬 몇 방울, 파편 하나를 보여 주세요.
호수에서 나온 새가 물방울을 몇 개 묻혀 나르듯
바람이 소금 알갱이 하나 실어 나르듯
--- 울라브. H. 하우게
우리는 손바닥만 한 병에 바다를 담으려 했다가 오히려 마음의 한쪽을 바다에 쏟고 돌아왔다. 눈앞에 가득하지만, 한 모금도 삼킬 수 없는 지독한 아름다움. 차라리 눈이 멀어버리고 말 풍경, 그것이 바다일 것이다. 그러니 세상이여, 모든 진리를 우리에게 건네지 말기를. 그 앞에서 인간은 소금 알갱이 하나만을 혀에 올릴 수 있을 뿐이다.
하나의 온전한 바다였던 어린 문어와 아이의 짧은 만남은 모래 속으로 사라진 첫 파도 같은 일일 것이나, 그 상실의 저녁, 통영 바다에 흔들리던 윤슬처럼 우리는 소금 알갱이 하나의 길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잊지 않기 위해 병 속에 바다를 담으려 하지만, 그래서 결국 더 멀리 잊힌다. 매번의 가을처럼.
돌아서는 아이의 옷깃에 바람의 하얀 가루가 반짝인다.
출처 -시와 반시 2025. 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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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인 - 2023 [시와 반시] 에세이스트 신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