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채린-4강] 나의 완벽한 배신자 파트너

역시 김동현은 잘 생기게 묘사해야 제 맛!

by 정채린

04화 4주 차 - 감각 자극 글쓰기

숙제: 감정을 감각으로 번역하기

외로움, 설렘, 불안, 질투, 그리움 등 추상적 감정 1개를 선택해 그 감정이 느껴지는 순간을 1,000-1,500자로 묘사하세요.

라는 숙제를 써보았습니다.



나의 완벽한 배신자 파트너




어둠 속에서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들리는 치익 소리와 함께 무대 앞부분에서 인공 안개가 피어올랐다. 글리세린과 이소파라핀 계열의 달큰하고 고소한 냄새, 보통은 무색무취라고 이야기하겠지만 나에게는 생크림보다 부드럽고 새벽 숲의 공기보다 신선하게 오감을 깨우는 냄새다.

나는 지금 오천명의 관객 앞에 있다. 이 무대에 서기 위해 오 년간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국제 마술사 대회 결승전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조명이 켜지는 순간, 뜨거운 스포트라이트가 미리 준비해 둔 테이블을 데우며 화려한 장식을 비췄다.


"한국 대표 백지나의 무대입니다." 사회자의 소개에 맞춰 하얀색의 스포트라이트가 붉은빛의 사이드라이트로 바뀌었다. 공간의 모든 것이 긴장하고 있는 이때 나의 표정은 놀랍도록 차분했다. 그러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에서 차가운 금속 냄새 같은 게 났다. 꽤 오래 맡아 왔지만 익숙해지지 않는 긴장의 냄새. 국제 마술 대회 결승전이라는 무대 자체 때문이 아니었다. 조명이 비추지 않는 무대 뒤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패츌리와 머스크 향수 냄새. '그' 때문이었다.


김동현.

한때 나의 가장 큰 라이벌이었고,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내 조수가 된 남자. 3개월 전 그의 파트너가 불미스러운 사고로 팀을 떠나면서 안겨준 빚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상태로 한 팀이 되었다.

"진짜 맘에 안 들어. 진짜, 진짜로!"

연습할 때마다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그는 언젠가 날 배신할게 분명했다. 그 조각 같은 완벽한 얼굴 뒤에 무슨 생각이 숨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언젠가는 천사 같은 미소로 나를 안심시킨 후 무대와 관객 위에서 나를 밀어내고 망신시킬 것을 대비해 나는 항상 그에게 신경을 바늘처럼 벼르고 있었다.


오늘의 마술은 복잡한 탈출 마술이었다. 석영기둥 모양의 좁은 유리관에 물을 채운 후, 거의 벗다시피 한 동현을 결박하여 넣어놓고 칼로 한 번 자른 뒤, 공중 부양 시킨 채로 탈출시키는 마법에 가까운 묘기였다.


"집중해, 백지나."

나는 속으로 나 자신을 다그치며 투명한 줄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두 개로 나뉘어 잘라진 동현의 몸 조각이 천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동현의 상체와 하체가 물속에서 허우적 댈 때마다 유리관 내부의 물 표면에서 빛이 춤을 추었다. 조명이 비추는 각도에 따라 다채로운 색으로 흘러내리는 빛줄기와 흔들리는 물 표면에 반사되는 오로라빛 광채 속, 검은 줄로 묶인 근육질 남성의 신체는 기괴한 아름다움을 뿜어냈다. 관객들은 그 모습에 압도된 듯 "오오!" 하는 감탄사만을 내뱉고 있었다.

그런데.


"지나 씨."

어둠 속에서 동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와 다르게 굉장히 낮고 떨리는 목소리였다.

"화장실... 급해요."

"에?"

"죄송해요. 진짜... 안 되겠어요."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그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믿을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 결승전 무대 한가운데서?

20초.

이 무대의 클라이맥스가 지나고, 조명이 꺼진 후 다시 켜지기까지는 딱 20초 남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질렸다. 아니, 정확히는 새빨갛게 변했다.

'시발!'


손이 덜덜 떨렸다. 역시 그랬다. 역시 그를 이 큰 대회에 데리고 오는 게 아니었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예상하고 있었으면서 나는 왜 그를 이 마법의 조수이자 모델로 데려온 걸까. 물론 그의 훌륭한 보조기술과 아름다운 외모는 마술을 성공시키고 관객과 심사위원의 마음을 홀리는데 적합하다. 지금 무대 위 유리관 내부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마네킹을 다른 사람의 모양으로 다시 만드는 데는 시간과 돈도 많이 소모된다.

'그래 그는 이 순간을 노리고 있었던 거야. 나를 완전히 망신시키고 무너트리려고. 국제 대회의 심사위원들 앞에서. 생중계 카메라 앞에서. 오천명의 관중 앞에서.'


관자놀이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어떠한 티도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곳은 나의 무대다 마술사가 흐트러지면 쇼의 모든 것이 흐트러진다. 나는 몸 전체가 미세하게 뻣뻣해지는 것을 경계하며 어깨를 살짝 올리는 것으로 긴장을 풀어보려 했다.


'와... 망했다. 이제 어떻게 하지? 아니, 이제 무직인 나는 뭘 하면서 먹고살지? 아니, 당장 한국에 가서 뭐라고 하지?'

그동안의 마술쇼 경력으로 표정은 제어할 수 있었지만 등 뒤를 흐르는 식은땀까지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오늘 쇼 복장으로 등이 깊게 파인 드레스식 정장을 입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10초 남았습니다. 지나 씨 괜찮아요?"

무대 감독의 목소리가 인이어로 들려왔다.

"네."

거짓말이었다. 전혀 괜찮지 않았다. 공중에는 지금 마네킹이 담긴 유리관이 떠있다. 동현이 돌아오지 않으면 조명이 켜지는 순간 모든 게 끝장난다.

"5초"

나는 다가올 야유와 실패를 향한 비난을 상상하며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저 배신자 때문에 내 커리어가 끝나더라도 마지막이 추한 모습이어서는 안 됐다.

"3초"

발소리가 들렸다. 동현이었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준비해 둔 통로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1초도 채 남지 않은 순간이었다.


조명이 켜졌고 동현은 정해진 자리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관객들에게 인사했다. 박수와 함께 환호성이 무대 가득 울려 퍼졌다. 나는 해냈다. 누군가는 휘파람을 불었고, 누군가는 "브라보!"를 외쳤다. 심사위원석에서도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나는 무대 위로 올라가 동현과 함께 성공적으로 무대를 마무리하고 내려왔다. 조명이 꺼지기 전까지 내 미소는 얼굴을 떠나지 않았으나, 꽉 진 주먹은 풀릴 생각이 없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입술을 깨물지 않았더라면 복도에서부터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분노가 온몸을 타고 올라와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니까. 저 배신자, 저 빌어먹을 놈.


나는 동현을 쳐다보지도 않고 빠르게 걸어 대기실로 들어오며 문을 쾅 닫았다. 이어 동현이 슬그머니 문을 열고 나타났다.

"대체 무슨 짓이죠? 미쳤어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참지 못하고 동현에게 소리를 지른 건 내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짐승이었다면 뭐라도 집어던지거나 그를 물어뜯었을 테니까.

"미안해요."

동현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여전히 안색이 창백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을 보니 불같이 날뛰던 마음이 울렁거림으로 바뀌었다. 평소 위가 좋지 않았는데 긴장 때문에 신물이 올라오는 건가.

"미안하다고요? 이게 지금 미안하다는 말로 끝날 일이에요? 일부러 그런 거죠? 날 망신시키려고?"

"아니에요."

"그럼 뭐죠? 결승전 무대에서 갑자기 화장실이 급하다니 그게 말이 돼요?"

동현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턱선이 바르르 떨렸다.

"배가... 너무 아팠어요. 어제저녁부터."


'어제저녁?'

협찬사와의 만찬이 떠올랐다. 프랑스 요리 전문점이었다. 나는 분위기를 띄우려고 메뉴를 이것저것 주문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설마 굴 때문에?"

동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탈이 났어요. 밤새 화장실만 들락날락했고, 아침에는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동현이 굴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저번 회식 때에도 다른 건 다 잘 먹었으면서 굴은 입에도 대지 않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나는 어제 굴을 주문했다. 내가 이 무대에 서게끔 비용을 협찬해 준 협찬사 대표가 해산물을 좋아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좋은 인상을 남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왜... 먹었어요? 싫다고 하지 그랬어요."

동현이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협찬사 앞에서 까다롭게 굴면 안 될 것 같아서요. 그리고..."

"그리고?"

"저희 사이가 좀... 좋아지면 어떨까 해서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네?"

"지나 씨가 저를 싫어하는 거 알아요. 당연하죠, 저도 예전엔 라이벌로만 생각했으니까. 근데 요즘은... 같이 연습하면서 생각이 좀 바뀌었어요."

동현이 처음으로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의 눈빛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지나 씨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마술사예요. 그리고 더 괜찮은 사람이고요. 그래서 저는... 이 팀이 계속됐으면 좋겠어요. 진짜로."

목구멍이 막혔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어제도 괜찮은 척했어요. 지나 씨가 협찬사 대표님께 잘 보이고 싶어 하는 거 보였거든요. 근데 그게... 이렇게 될 줄은..."

동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섞인 표정이었다.

"정말 죄송해요. 망치려던 게 아니었어요. 오히려..."

"아, 아니 그렇다고!"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알았어요, 이제."

이상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화가 난 것도, 배신감 때문도 아니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지만. 동현의 얼굴을 다시 보니, 조각 같은 외모 뒤에 숨겨져 있던 것이 보였다. 진심. 서툰 배려. 그리고 어쩌면 나와 비슷한, 상대를 믿고 싶지만 믿을 용기가 없었던 사람.


"다음부터는 못 먹는거 있으면 말해요."

내가 말했다. 목소리가 이상하게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고마워요. 무대로 돌아와 줘서."

동현이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천천히, 정말 천천히 미소 지었다. 무대 위에서 짓던 완벽한 미소가 아니라, 조금 삐뚤어지고 수줍은 미소였다.

이상하게도 그 미소가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네, 지나 씨."


복도 끝에서 누군가 우리를 호명했다. 시상식 시간이었다.

나는 동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같이 가요, 파트너."

동현이 내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따뜻했다.

우리는 나란히 무대로 걸어갔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어쩌면 이 엉망진창 같은 하루가, 우리 팀의 진짜 시작인지도 모른다고.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