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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걸리는 딸기잼
시간의 루비

빠르게 끓여야 하는 감정과, 오래 걸릴수록 빛나는 감정의 차이.

by 정채린

3일 걸리는 딸기잼.


처음 이 잼을 발견했을 때 나는 한참 요리에 미쳐 있었어.

요리라는 행위, 그 자체에 완전히 빠져 있었지.

그 때 내게 요리란, 각기 다른 우주에서 수집한 원소들을 하나의 냄비에 섞어서, 새로운 차원의 법칙을 만들어내는 연금술 같았달까. 요리는 마법과 예술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같았고, 레시피는 단순한 가이드가 아니라 오페라의 악보 같았어. 조리 시간도 그냥 시간이 흐르는 게 아니라, 오케스트라가 향과 맛의 음악을 연주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했지. 나는 물론 그 모든 것의 지휘자고.

수십 번의 실패도, 귀찮은 설거지도, 웃으면서 감내했고, 요리를 위한 수련처럼 여겼어. 요리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서, 마치 요리에 신앙심을 가지고 충성이라도 하는 것같았지.

그래서 도전할 수 있었지. 사흘이나 걸리는 딸기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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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잼을 봤을 때 든 첫인상은 '보석 같다!' 였어.

그만큼 황홀하고 영롱한 붉은 빛이었어. 그냥 예쁜 붉은색이 아니라, 시간이 빚어낸 루비처럼 보였지. 그전까지 내가 알던 딸기잼은 약간 어두운 붉은빛이었는데 이 잼은 딸기 요정이 붉은 반짝이 가루를 설탕 시럽에 풀어놓은 것 같은 색이었거든. 보는 순간 요리를 향한 내 열정에 불이 확 붙었어.

'이건, 만들어야겠다!'

내 손으로, 내가 원하는 색으로.


나는 당시 과일 품종 공부에도 한창 빠져 있었어. 사실 공부라기보다 덕질 같은 거였지.

복숭아, 사과, 배등 각 과일의 품종별 맛, 향, 식감과 출하시기 등을 기록하는 노트도 따로 가지고 있었거든.

그래서 3일 걸리는 딸기잼을 만들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제일 먼저 한 건 ‘딸기 품종 고르기’였어. 어떤 품종으로 만들어야 이 잼이 더 완벽해질까, 한참 생각했지.

003.png "딸기들은 모두 조금씩 달라요."

먼저 한국에서 가장 많이 먹는 딸기로 ‘설향’ 품종이 있어.

설향 품종은 향이 정말로 진한 딸기야.

만약 과일 가게 앞을 지나가고 있는데 그 앞을 걸어가고 있는 것만으로 코끝에 진한 딸기향이 스친다면 그 가게에는 아마 설향 딸기가 진열되어 있을 거야.

설향은 달콤함과 신선함이 조화되어 딸기 본연의 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품종으로 과육이 부드럽고 과즙이 풍부해. 한 입 깨물면 입에서 녹아내리면서 나를 봄날의 딸기밭으로 데려가 주지.


그 다음으로는 '금실’이라는 품종이 있어.

금실 딸기는 장미꽃이나, 허브의 꽃향기와 함께 복숭아향이 나는 딸기야 과육은 단단하다기보다는 쫀득한 느낌으로 입안에 가득 차는 과육의 농밀한 식감을 느낄 수 있고, 당도도 매우 높아서 깨무는 순간 "달다!" 하고 감탄사가 터져 나올 거야.

게다가 끝맛은 청포도처럼 신선하고 산뜻한 느낌으로 마무리돼. 마치 초여름 장미꽃이 만발한 정원에서 복숭아와 허브를 한데 모아 끌어안은 듯한 싱그럽고 우아한 향기와 단맛이 나지.


다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딸기는 마트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과일 가게에서는 종종 만나볼 수 있는 딸기 품종으로 ‘아리향’이라는 이름의 딸기야.

아리향은 설향보다 약간 단단한 식감으로 치밀하면서 탱탱한 식감이야. 금실처럼 쫀득하고 탄탄한 느낌에 달콤함이 강해. 이 딸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신맛이 거의 없어서야. 달큰한 첫 향과 뒤이어 따라오는 꽃향기는 나를 꽃밭에 피크닉 나온 딸기 소녀로 만들어주지. 아리향은 겨울과 봄의 경계에 나오는 딸기라서 가격이 조금 나가는 편이지만 처음 만나는 딸기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해


반면, 딸기 철의 마지막을 알리는, 흔히 ‘대야딸기’로 불리는 작은 딸기들 있지? 한 대야에 삼사천 원이면 살 수 있는 작은 딸기들은 ‘장희’라는 품종이야.

장희딸기는 말 그대로 좀 길게 생겼어. 약간 긴 몸통에 진한 단맛과 깊은 향기가 있지. 설향보다는 단단하고, 입안에서 퍼지는 향기가 더 농밀한데, 희한하게 딸기를 베어 물기 전에는 달큰하고 상큼한 향이 나긴 하지만 그렇게 진한 향이 입에 퍼질 거라고 생각되지 않을 거야.

장희는 그 향을 안에 숨기고 있다가. 깨무는 순간 터트리는 딸기야. 그리고 신 맛이 강하지. 이 딸기는 딸기잼을 만들기에 최고의 딸기야. 끓이면 더 진해지는 향기, 단단한 과육, 그리고 붉은 색과 저렴한 가격, 거기에 잼의 상큼함을 더해주는 신맛까지! 잼으로 만들어지기에 완벽하지.

003.png "품종을 맞춰보세요!"

장희 딸기는 내가 사흘 걸리는 딸기잼을 만들기 위해 고른 품종이기도 해. 상큼하고, 단단하며, 기다림 속에서도 흐트러지지 않고, 결국엔 자기 색을 증명해 내는 딸기야. 단단하고, 싸고, 시간을 들여 설탕과 함께 재우고 끓이기를 반복하면 영롱한 루비색으로 변하는 완벽한 딸기잼용 딸기.


물론 나는 잼을 만들기 위해서만 딸기를 고르는 건 아니야. 그냥 먹기 위해서도 딸기를 골라.

딸기를 공부하면 할수록 내가 원하는 맛이 뭔지, 그리고 오늘 내 기분이 어떤지에 따라 딸기를 고르게 되더라고. '오늘은 기분이 좀 우울하니까 상큼한 하이베리를 사볼까.' 라던가 '오늘은 감기 기운이 있고 몸이 좀 안 좋네.' 싶으면, 부드러운 설향을 고르는 식이야.

용도에 따라서도 딸기를 달리 골라. 딸기 케이크를 만들 때, 홍차에 곁들일 때, 그냥 생으로 먹고 싶을 때, 우유에 갈아 마시고 싶을 때, 그때그때 어울리는 딸기가 다 따로 있어.


나는 딸기를 좋아해. 그리고 잘 알아.

같은 딸기도 어떻게 익히고, 어디에 넣고, 어떤 것과 같이 먹느냐에 따라 다른 맛이 된다는 걸 알고있어.

딸기는 어떤 온도에서 몇 시간을 익히느냐에 따라서도 색이 바뀌고 향이 달라지고 식감도 달라져.

사람도 그렇잖아. 관계도, 감정도, 기억도. 어떤 레시피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다른 맛을 내. 같은 사람이어도 누구랑 있었느냐, 어떤 대화를 했느냐, 그때 내 마음이 어땠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다르게 기억되고 전혀 다르게 남아.


그리고, 딸기는 대부분은 다 비슷하게 생겼다고 생각하잖아.

길쭉하거나 동글동글하거나 넓적하거나 뭐 그게 그거지 싶을 거야. '만년설'이라고 불리는 하얀 딸기나, 손바닥만 한 킹스베리 같은 극단적인 예외를 빼면 사실 겉모습만 봐선 구분이 쉽지 않아.

꼭지 모양도 조금씩 다르긴 한데, 정말 조금의 차이야. 잎이 더 뾰족하거나 위로 살짝 말려 있다거나 하는 정도? 그걸 구분하는 사람은 솔직히 많지 않지.

아마 예민한 사람이거나, 딸기를 정말 좋아하거나. 딸기로 돈을 버는 사람이겠지?

근데 말이야, 그 작은 차이라고 해서 무시할 수는 없어. 조금 다르다고 같다고 할 순 없잖아.

붉은 정도, 단단함, 향기, 과육의 물성, 입 안에서 퍼지는 속도. 미세한 차이지만 그걸 느낄수 있는 사람한텐 전부 다르게 보인다고.

어떤 딸기는 겉은 멀쩡한데 향이 약하고, 어떤 딸기는 향은 좋은데 속은 비어 있고, 또 어떤 딸기는 작고 단단하지만 한 입 깨물면 톡 하고 단물이 터지면서 갑자기 존재감을 드러내.


사람도 그래. 다들 비슷해 보여. 첫인상으론 그 사람을 다 알 수 없어.

그런데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사람마다 전혀 다른 감정과 기억을 품고 있어.

어떤 사람은 밝아 보이는데 상처를 많이 겪은 사람일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조용하고 묵직해 보이지만 속은 텅 비어 있을 수도 있어.

어떤 사람은 담담해 보이는데 아주 여린 사람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똑똑해 보이는데 지적 허영심으로 가득 차 있을 수도 있지.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걸 알아채는 사람이 있거든.

상대방의 감정을 예민하게 알아채는 사람.

그 사람의 개성을 섬세하게 관찰해 주는 사람, 다름을 다름대로 인정하고 맞춰주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 진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모든 사람을 똑같은 방식으로 대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맛과 결에 맞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더 따뜻한 사람이 아닐까 싶어.

GettyImages-jv11780193.jpg "안녕하세요. 설향이에요."

장희딸기로만 이 3일 걸리는 딸기잼을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야.

나는 이 잼을 설향으로도 만들어봤거든.

설향으로 만든 3일잼은 장희딸기로 만든 것보다 덜 붉고, 색감이 좀 더 핑크빛에 가까웠어.

붉다기보단 분홍.

근데 색은 연해도 향기만큼은 정말 최고였어. 단맛은 설탕이 채워주고, 신맛은 레몬즙이 책임지니까. 설향 딸기로 만든 잼은 맛보단 향기가 주인공이야. 향기가 가득한 분홍빛 잼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 이건 단순히 연하거나 불완전한 색이 아니라, 시간을 들여 만들어진 완성된 색이구나.

그리고 설향의 섬세함이 향뿐만 아니라 색으로도 나타나는구나.

그런 사람 있잖아.

처음 봤을 때는 흐릿하거나 존재감이 뚜렷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향긋한 마음의 향이 느껴지고, 부드러운 태도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녹아버리는 그런 사람.

설향으로 만든 딸기잼은 딱 그런 느낌이었어. 조용한 존재감, 근데 진한 감동.


반면에 킹스베리처럼 처음부터 확 눈에 띄는 사람도 있지. 크고, 화려하고, 존재감이 아주 뚜렷한 사람. 그런 사람은 한 번만 봐도 절대 잊히지 않아. 당도는 금실딸기보다는 좀 떨어질지 몰라도, 그 압도적인 크기와 모양 때문에 누구보다 눈에 잘 띄는, 그런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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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걸리는 딸기잼. 말은 거창한데 사실 조리법은 진짜 간단해.
첫날은 일단 딸기를 잘게 잘라서 설탕에 버무리고, 그 위에 쿠킹 페이퍼를 덮어서 냉장고에 넣어.
다음 날, 설탕에 절인 딸기를 한 번 후루룩 끓인 후 쿠킹 페이퍼로 덮어 다시 냉장고에 넣어.
마지막 셋째 날엔, 과육이랑 시럽을 나누고 시럽에 레몬즙을 넣어서 원하는 농도까지 졸여.
그리고 마지막에 딸기 과육 넣고 또 한 번 후루룩 끓여서 끝내는 거야. 의외로 쉽지?

팔 아프게 불 앞에서 계속 휘젓고 있을 필요도 없고, 딸기를 으깰 필요도 없어.
그냥 천천히, 시간만 오래 걸리는 요리야.

어떤 일은, 예상보다 훨씬 더 쉽더라고. 마음먹는 데 오래 걸려서 그렇지.

그리고 냉장고에 둔 딸기잼을 생각하며 사흘을 보내는 것도 몸은 쉽지만, 마음은 쉬운 일이 아닐 거야.

조바심이 나더라고. 자꾸 냉장고를 열어보고 싶고 빨리 끝내고 싶어 재촉하는 마음을 눌러 진정시키고 기다리는 일이 이 '3일 걸리는 딸기잼' 만들기의 진짜 팁이고. 레시피인 거 아닐까.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했던 건 딸기만이 아니라, 나도 그랬는지도 몰라.

또는 좀 더 가볍고 따뜻한 느낌으로

“딸기는 설탕 속에서 천천히 녹아가고, 설탕은 딸기색으로 물들고, 나는 그 시간을 지켜보며 조금씩 단단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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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걸리는 딸기잼 레시피

출처 : Fanny Zanotti – Pastry chef and food writer


- 재료

ㆍ 딸기 1Kg

ㆍ 설탕 850g

ㆍ 레몬 1개의 즙 (반드시 생 레몬을 바로 짜서 사용할 것)


- 만드는 방법

1일차

ㆍ 큰 유리볼이나 도자기그릇에 딸기를 넣습니다. (쇠나 알루미늄 재질은 사용하지 마세요.)

ㆍ 설탕과 레몬즙을 넣고 저어준 다음 쿠킹필름으로 덮고 냉장고에 하룻밤 둡니다.

2일차

ㆍ 과즙이 흘러나오고, 적당히 물러진 딸기를 냄비에 넣고 중불에서 한 번 호로록 끓여 식힙니다.

ㆍ 냉장고에 넣습니다

3일차

ㆍ 딸기를 걸러 시럽과 과육을 분리합니다

ㆍ 시럽을 거품을 걷어내며 2번 거품이 올라올 때까지 끓입니다

ㆍ 끓는 시럽에 분리한 과육을 넣은 뒤, 원하는 농도가 될 때까지 저어가면서 끓입니다. (5~10분)

ㆍ 시럽은 숟가락을 코팅할 수 있을만큼 끈적하게 달라붙어야 하고, 딸기는 반투명해집니다.

ㆍ 식혀서 소독한 병에 넣고 밀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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