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황과 진술은 잉꼬부부사이여야 한다.
우선, ‘정황’이란 “화자가 처해있는 상황, 시간, 공간, 대상, 관계” 등 말이 발생하게 된 조건 전체를 말한다.
소설로 치자면 사건의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사건의 배경이 없이 사건을 말하게 되면 사건은 현실성이나 구체성을 가지지 못하고 허공에 떠버리듯, 정황이 없는 진술은 화자의 감정을 이해할 수는 있어도 그 감정을 체험하지는 못한다.
이때 시는 설명문이나 고백문처럼 느껴진다.
그다음, ‘진술’이란 그 정황 속에서 화자가 실제로 내놓는 말, 생각, 판단, 감정의 표현이다.
소설에서는 ‘대사’또는 ‘지문(설명)’에 해당한다.
정황만 있는 시는 상황과 장면은 풍부하지만 그 정황 속에서 화자가 어떤 입장에 서 있는지, 무엇을 말하려는지 드러나지 않는다.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면 단순히 풍경과 동물의 사실만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한 편을 이끌어나가는 주인공을 선정해 놓고 그 주인공의 스토리를 따라가는 구성 되어있다. 만약 주인공이 없는 자연 다큐멘터리를 본다고 생각해 보자, 끊임없이 이어지는 산림과 폭포의 웅장한 모습 그리고 날아다니는 새들을 원경에서 찍은 다큐멘터리는 처음 몇십 초는 주의를 끌 수 있지만 이내 계속되는 같은 화면에 몇 분 후에는 자연스럽게 지루함을 느낄 것이다.
이처럼 정황만 있는 시는 지루하다. 읽는 내내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생각이 들게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황’과 ‘진술’이 둘 다 있으면 되는 것일까. 이제 정황과 진술의 관계도 살펴봐야 한다.
만약 정황을 그저 진술의 도구로 사용한다면, 독자는 자신이 직접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작가에 의해 생각과 감정이 주입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경우 작품은 독자에게 감동을 주기 어렵다. 만약 감동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두 번 읽을 재미를 주지는 못한다.
또한 진술을 그저 정황의 도구로 사용한다면, 정황이 상징으로 굳어버린다.
정황은 원래 살아있는 상황이어야 하는데 진술이 먼저 정해진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정황을 끌어왔기 때문에 정황은 더 이상 사건이 아니라 의미를 설명하는 표지(기표)가 된다. 사실 이 경우에는 ‘못 쓴 시’는 벗어났다. 앞서 설명한 ‘정황을 진술의 도구로 이용하기’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이다.
그럼에도 ‘진술을 정황의 도구로 이용하기’는 다음 세 가지의 단점이 생겨난다.
첫째, 독자의 체험이 차단된다. 독자가 느끼거나 추론할 여지를 잃게 되어 이해하는 시에서 벗어나 그저 읽히는 시가 된다.
둘째, 진술이 설명문처럼 기능한다. 문장이 감정을 드러내기보다 의도를 설명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때 시는 에세이적 성격을 띠게 된다. 이는 산문시와는 의미가 다르다.
(산문시: 정황에 의해 발생한 진술이 산문의 형식을 띤 시, 에세이적 시: 진술이 먼저 있고 정황이 이를 보조하는 시)
셋째, 정서의 반향이 단선화 된다. 시의 정서가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면서 독자는 그 흐름을 따라가기만 할 뿐 정황 안에서 스스로의 감정을 발견할 수 없다.
넷째, 시의 긴장이 사라진다. 정황과 진술 사이에는 원래 말하여지지 않은 여백과 주체와 시어 사이의 거리에서 생기는 긴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진술이 정황을 즉시 해석해 버리면 긴장이 느슨해지며 시는 평면적인 구조가 되어버린다.
잘 쓴 시는 설명이 아니다. 시는 말하지 말아야 한다.
시는 보여줘야 하며, 느끼게 하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시에서 중요한 것은 시어가 발화되기까지의 정황이 충분히 설득력을 가지는가 하는 점이다. 정황과 진술이 인과적으로 동등한 무게를 가지며 맞물릴 때, 시는 설명을 넘어 체험이 되고 살아난다.
이 글은 시를 처음 접하는 사람을 위한 설명은 아니다. 정황과 진술이라는 개념을 언어로 정리해 두었지만 이 글만 읽고 그 차이를 곧바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시는 원래 설명으로 이해되는 장르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이에게는 이 글이 추상적인 말의 나열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번주의 나처럼 시를 배운 후에 어떤 지점에서 멈춰 서 있는 사람에게 정돈된 좌표 하나를 던져주고 싶은 마음에 글로 정리해 보았다.
이에 내가 생각하는 적절한 예시의 시를 가져왔으니 꼭 읽어보길 바란다.
1. 마징가 Z
기운 센 천하장사가 우리 옆집에 살았다 밤만 되면 갈지자로 걸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고철을 수집하는 사람이었지만 고철보다는 진로를 더 많이 모았다 아내가 밤마다 우리 집에 도망을 왔는데, 새벽이 되면 계란 프라이를 만들어 돌아가곤 했다 그는 무쇠로 만든 사람, 지칠 줄 모르고 그릇과 프라이팬과 화장품을 창문으로 던졌다 계란 한 판이 금세 없어졌다
2. 그레이트 마징가
어느 날 천하장사가 흠씬 얻어맞았다 아내와 가재를 번갈아 두들겨 패는 소란을 참다못해 옆집 남자가 나섰던 것이다 오방떡을 만들어 파는 사내였는데, 오방떡 만드는 무쇠 틀로 천하장사의 얼굴에 타원형 무늬를 여럿 새겨 넣었다고 한다 오방떡 기계로 계란빵도 만든다 그가 옆집의 계란 사용법을 유감스러워 했음에 틀림이 없다
3. 짱가
위대한 그 이름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그가 오후에 나가서 한밤에 돌아오는 동안, 그의 아내는 한밤에 나가서 오후에 돌아오더니 마침내 집을 나와 먼 산을 넘어 날아갔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겼다 그 일이 사내의 집에서가 아니라 먼 산 너머에서 생겼다는 게 문제였다 사내는 오방떡 장사를 때려치우고, 엄청난 기운으로, 여자를 찾아다녔다 계란으로 먼 산 치기였다
4. 그랜다이저
여자는 날아서 어디로 갔을까? 내가 아는 4대 명산은 낙산, 성북산, 개운산 그리고 미아리 고개, 그 너머가 외계였다 수많은 버스가 UFO 군단처럼 고개를 넘어왔다가 고개를 넘어갔다 사내에게 驛馬(역마)가 있었다면 여자에게는 桃花(도화)가 있었다 말 타고 찾아간 계곡, 복숭아꽃 시냇물에 떠내려 오니… 그들이 거기서 세월과 계란을 잊은 채… 초록빛 자연과 푸른 하늘과… 내내 행복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