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예술인 마을 & 스페이스 예나르
지난 주말에는 회사 워크샵으로 제주를 다녀왔다. 2박 3일 일정이었지만, 금요일 저녁에 도착해서 일요일 아침에 돌아가는 일정이라, 긴 일정을 잡을 수 없었다. 그래도 가자고 팀원 W가 말했다. "제주는 30분만 있어도 좋다"며 무조건 가자고 했다. 왠지 고개가 끄덕여지는 멋진 말이어서, 실제로 제주는 그럴 거야 하고 믿게 되는 그런 말이었다.
그렇게 제주에 도착해서, 그나마 있는 토요일 일정도 함께 무언가를 하기보다 각자 하고 싶은 것을 하다가 저녁에 만나자고 했다. 나는 느긋하게 늦잠을 잤고, 내가 일어났을 때는 다들 어디론가 흩어진 상태였다. 나는 계획도 없었고 계획을 짤 생각도 없었다. 해변이 보이는 카페로 들어가서 노래 들으며 책을 읽었다. 간간히 담배 피우려고 나간 제주의 오전은 여전히 바람이 따뜻하고 보드랍게 느껴져서 기분이 좋았다. 몇몇 무리가 왔다가 다시 밖으로 나가길 두어 차례, 팀원들이 단톡 방에 자신들이 무엇을 봤고, 무엇을 먹었다고 사진을 잔뜩 올렸다. 그제야 안 되겠다 싶었다. 길로 나가 버스정류장에 서서 기다리다가 첫 번째로 오는 버스를 타기로 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 이번 정류장이 무슨 포구라고 하기에 왠지 멋진 곳일 것 같아서 내렸다. 여기서 아저씨들 낚시하는 거 구경하면서 담배 피웠다. 그런데 또 막상 나오니까 이런 게 또 좋았다. 그래서 네이버 지도를 펴서 적당히 확대해서 꽤 유명한 곳만 나오도록 했다. '저지대 예술인 마을'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가는 길에 와썹맨에 나왔다는 고기국수가 있어서 그것도 먹었다.
가는 길에 귤나무가 많아서 사진도 찍었다.
그렇게 도착한 예술인 마을. 동물원 정도의 크기에 크고 작은 미술관이 모여 있어서 걸어서 산책하듯이 천천히 둘러봤다. 부부와 연인 그리고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이 많았다. 여행객 일지, 지역 주민 일지 알 수 없었지만, 모두들 발걸음이 무척 여유로웠다.
제주 현대미술관 본관을 먼저 갔는데, 인포데스크에서 표를 살 때 재밌는 일이 있었다. 표를 사려고 한다고 했더니, 처음에는 학생이냐고 했고, 아니라고 했더니, 그러면 제주도민이냐고 했다. 그것도 아니라고 했더니 뭔가 상당히 아쉬워하시면서 카드를 받고 표를 끊어주셨다. 그건 보통 할인이 되는 카테고리였다. 뭔가 되게 할인을 해주고 싶어 한다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을 받았다. (돌이켜 생각하니 그냥 학생이라고 거짓말할걸 하는 생각도...) 표를 주시면서 방금 큐레이터의 설명이 시작되었으니 들으셔도 좋을 것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본관의 김흥수 상설전도 멋졌고, 그 외에도 멋진 전시가 많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전시는 '예나르'라는 곳이었다.
미술관이라는 공간을 늘 좋아했다. 붐비지도 않고, 서늘하고, 천장이 높았고, 조용했고, 깨끗한 화장실이 있고, 지치면 앉아 쉴 수 있도록 하는 섬세한 배려가 있었다. 하지만 미술관마다의 개성적인 공간과 전시 작품이 연관성에 대해서는 그다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곳에서 하게 됐다.
이 전시 다른 곳에서 진행되었어도,
지금과 같은 감동을 줄 수 있을까?
감동이 적었을 것은 분명했고, 어쩌면 감동을 전혀 받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았다. 크기 않은 전시장이었지만 사람들이 가득했고, 나는 꽤 오래 봤지만 아쉬웠다. 사람이 적었다면 좀 더 머물고 싶었지만 아쉬움은 작은 도록을 사서 두고두고 보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입구에서 작은 도록을 집어 들고 돈을 지불하려고 하는데, 웃으면서 오늘은 오픈하는 날이라 돈을 받지 않겠다고 하셨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도록을 받았는데, 왠지 낯설었다.
장사를 하는 집에서 개업일에 서비스를 주는 것은 앞으로도 많이 사 드시라고 하는 것이고, 새로 이사 간 곳에 떡을 돌리는 것은 앞으로 잘 지내자고 하는 것이다. 그건 행동과 목적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미술관에서 유료 도록을 무료로 주는 것은 무슨 목적일까 하고 생각했다. 미술관은 정말 마음에 드는 전시라면 같은 전시를 여러 번 가기도 하겠지만, 보통은 새로운 전시가 있을 때마다 갈 텐데 말이다. 그리고 혹시 이럴 수도 있지 않까 하고 생각했다, 나처럼. 여유롭게 그림을 보고 싶은 사람도 있을 텐데, 조용한 주말을 보내고 싶은데, 갑자기 붐비는 사람 때문에 본의 아니게 피해를 줬을 수도 있으니, 처음 문을 여는 그날만큼은 모두에게 조금 더 베풀자 하는 마음 말이다. 나만의 생각으로, 이번에도 제멋대로 하는 오해일지도 모르겠지만, 기분 좋은 순간이었다는 것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02. 알 수 없는 목적으로 베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