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서 가장 어둡고 우울했던 시기가 언제였을까 생각해보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2001년 대학 새내기 시절이 떠오른다. 그 동안은 새 학년이 되면 자연스럽게 같은 반이 되는 친구들이 있었고, 수업을 모두가 같이 들으면서 ‘삶’을 공유할 수 있었는데, 대학생이 되니 같은 반이라는 건 의미 없는 것이었고, 수업도 내가 정해서 들어야 했다. 게다가 나는 수강신청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몇몇 필수 과목들을 다른 학과수업으로 들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내가 사람을 사귀는 것에 굉장히 미숙했다는 것을 그동안 몰랐었다는 것이다. 초중고 시절은 그래도 원래 알던 친구들이 몇몇은 같이 진학해서 적응하는 것에 어려움이 없었는데, 대학은 아니었다. 대학에서는 인간관계도 적극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나는 새내기 시절, 학과에서는 존재감 없는 아웃사이더로 생활했고, 수업도 잘 안 들어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에는 나름 이유있는 일탈이었지만 부끄러운 과거로 남아있다.
대학 새내기 시절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시기에 나는 죽음이라는 것을 가장 많이 생각했던 것 같아서다. 나는 공대 소속이었지만 1학년은 필수교양으로 ‘철학의 이해’라는 수업을 이수해야 했다. 첫 시간에 교수님이 학생들 전체를 향해 했던 질문이 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이런 질문이었다.
“만약, 당신이 한 가지 능력을 가질 수 있다면, 어떤 능력을 갖겠습니까?”
여러 학생들이 많은 이야기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누군가는 독심술을 갖고 싶다고 했고, 어떤 학생은 자신 만의 섬을 살 수 있는 재력을 원했던 것 같다. 그날따라 교수님은 직접적으로 나를 지명하며 질문에 답하기를 요구하셨다. 내 대답은 “저는 제가 죽는 날짜를 알고 싶습니다.” 였다. 주변에서 술렁술렁하는 게 느껴졌다. 교수님은 약간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시면서도 아주 부드럽게 수업을 이어가셨다. 그 교수님은 사람이 언제 죽을지를 알게 된다면, 그 즉시 그의 인생은 시한부 인생이 된다고 이야기하셨다. 그러면 남은 인생을 계획하게 되고, 죽음을 계획하는 동시에 남은 삶을 계획하게 된다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결국 죽음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것은 삶을 더 잘 살게 되는 결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자칫 우울감에 빠지고 비관적인 태도를 갖게 될 거라고 염려할 수도 있겠지만, 확실한 것은 어느 누구라도 반드시 죽게 된다는 것이다. 미래에 다가올 죽음이라는 결과를 외면하며 사는 삶보다 그것에 직면하고, 미리 생각해보며 아직 주어진 삶에 더욱 충실하게 사는 것이 더욱 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지금도 대학생 시절처럼 자주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지 묻는다면, 나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자신의 죽음에 대해 회피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예견된 결과에 매몰되어 살 필요 또한 없다고 생각한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원제- Advice for future corpses)]의 저자 샐리 티스데일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곁에서 돌보며 깨달은 생각들을 매우 사실적이면서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노화와 병환으로 인해 생명이 꺼져가는 모습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때로는 죽어가는 사람들이 전적으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일상의 사소한 모든 행위들에 대해 도움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자신이 만약 그렇게 전적으로 다른 사람의 손길에 의지해서 살아가야 한다면 거부하고 회피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객관적이지 못할 때가 많다. 나이가 드신 부모님의 수발을 드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내가 늙어서 자녀들의 짐이 되는 것은 무척이나 싫다. 그리고 은연중에 내 인생의 마무리는 부디 좀 더 쉽고, 덜 더럽고 가족들을 덜 힘들게 했으면 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저자가 시신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을 할 때, 소름이 돋았다. 흔히 삼국지 같은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대사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삼국지에서는 종종 전장에서 적국의 두 장수가 만났을 때, 상대를 도발하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가 오늘 너를 죽이고 네 시체를 들판의 개와 새가 뜯어먹도록 만들겠다.” 이런 식이다. 때로는 “내가 오늘 너를 죽이고 너의 고기를 씹지 않는다면,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도 말한다. 저자는 시신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땅 속의 벌레가 먹고, 들판의 새와 썩은 고기를 먹는 짐승들에 의해 분해되며, 결국에는 미생물들에 의해 더욱 잘게 부서져 자연화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때때로 자신의 시신이 그렇게 변하는 과정(구더기가 뜯어 먹고, 새와 개들이 자신의 시체를 먹는 과정)을 상상해본다고 한다. 이런 직접적인 서술에 나는 너무 놀랐다. 그는 그토록 죽음에 대해 현실적이고 직면하여 보고자 노력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저자는 자신의 어머니가 죽은 후, 온갖 방부제에 의해 마치 성형수술을 받은 것 마냥 변한 모습에 분노를 느꼈다고 했다. 그러한 시신이 땅에 묻히면 분해되는 시간도 더 걸리고, 결국에는 여러 오염물질들이 뒤섞인 채 토양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것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 것이 이 책을 읽으면서 얻은 수확 중에 하나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애도’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다. 애통하는 마음은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상실감에 대한 감정이다. 우리는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던 사람 혹은 반려동물, 물건 등을 잃었을 때 슬픔을 느낀다. 그리고 애통은 다른 감정들과 달리 뇌의 여러 부분이 동시에 작용한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는 생각을 하거나 자신이 죽는다고 생각할 때, 두려움을 느낀다. 저자는 이 또한 직시해야 한다고 한다. 애도는 ‘마지막 숨을 거둔 후에 내쉬는 또 다른 숨’이라고 하였다. 정말 명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던 나는 그의 죽음으로 인해 같이 숨을 거두었고, 애도를 통해 그가 없는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것, 또 다른 숨을 내쉬며 삶을 이어가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리고 그가 없는 세상에서 그를 향한 그리움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쁨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죽음을 생각함으로 내 인생을 다시 돌아보게 된 것이 특히 좋았던 것 같다.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나를 두렵게 한다. 그렇지만 유한한 삶이기에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을 더 사랑할 힘을 얻게 되는 것 같다. 주변의 사람들을 더 사랑하자는 것이 저자가 의도한 바인지는 확신이 서지 않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윤동주 시인의 서시가 생각났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겠다는 시인의 다짐이 조금 공감이 되었다.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해볼 수 있게 해주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를 모두가 읽어보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