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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규원 Feb 06. 2020

옛 동창생에 대한 미안함

적극적 방관과 소극적 동조

  오랜 기간동안 잊고 살다가 얼마 전 불쑥 떠오른 과거 나의 부끄러웠던 기억이 있다. 나는 그것을 부당함에 대한 적극적 방관 혹은 소극적 동조라고 말한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일반 학급 외에 별도의 특수학급(특수반)을 운영했었다. 소속은 다른 친구들과 같은 반이었지만 수업만 별도로 듣는 것이었다. 나는 나와 이름의 초성이 같은 한 아이와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이다. 그리고 나는 그 아이와 적어도 두번은 같은 반이었다. 그 아이는 특수반에서 따로 수업을 들었는데 그래서 점심시간과 종례시간에만 반으로 돌아왔었다. 반 아이들은 성숙하지 못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 아이는 모두의 놀림거리였고, 폭력과 조롱의 대상이었다. 반 아이들은 적극적으로 괴롭히는 아이들과 주변에서 바라보는 아이들, 무관심한 아이들로 구분되었다. 적어도 내가 같은 반이었던 때에 우리 반에서 그런 행위들이 잘못되었다고 아이들이나 선생님께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도 그저 친구들끼리 장난치는 것 정도로 생각했었고, 괴롭힘을 당했던 그 아이도 잘 견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난 것은 내가 부모가 되고 나서 우리 자녀들을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그 기억이 불쑥 떠오른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적장애를 가진 부모의 심정이 조금 느껴지는 것 같아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 아이와 같은 중학교로 진학하게 되었을 때, 그 아이와 같은 반이 되었다. 중학생이 되었지만 그 아이의 어머니는 여전히 학교까지 와서 아들을 챙겨주던 모습이 기억난다. 내가 아빠가 되고 보니 자녀들을 생각할 때마다 항상 아이들의 안전과 건강이 걱정되고,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서 생활할 때 아이들이 느끼는 기분과 감정은 어떨지 생각하게 된다. 한번은 우리 딸이 자기들보다 나이 많은 언니들과 놀던 중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소외되어 침울해했다는 것을 전해들었는데, 나는 직접 본 것도 아니고 전해들은 것만으로도 그 모습이 상상이 되어 마음이 아팠던 적이 있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불현듯 떠오른 예전 동창생에 대한 기억으로 인해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그 아이와 나는 이름의 초성은 같고 실제로 이름도 가운데 한글자만 약간 다르고 비슷했다. 나는 그 아이와 이름이 비슷한 것 만으로도 그 아이를 좋아하지 않을 충분한 이유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실제로 중학교 때 우리 반에서는 그 아이의 이름을 다른 누군가를 놀리기 위한 명칭으로 사용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부끄러운 일이다. 다른 이의 아픔을 조롱의 수단으로 삼는 것은 참 비겁하고 부당한 행동이다. 내 자녀가 아주 조금이라도 피해를 입는 것 같으면 부모로써 속상해 하는데, 아마도 그 아이의 부모님들은 평생 그런 마음을 갖고 살았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지금까지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 때 그 아이가 놀림을 당했을 때 나도 속으로 그 상황을 방관하며 동조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괴롭힌 것이 아니니까 나와는 상관없는 줄 알았는데, 그냥 가만히 있었던 것도 옳은 게 아니었다. 






  성인이 된 후, 길에서 양복을 입고 누군가와 함께 있었던 그 아이를 본 적이 있다. 시간이 지났지만 얼굴이 하나도 변하지 않아서 보자마자 알아볼 수 있었다. 그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있는 지금, 그가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꼭 행복하기를 바란다. 




Photo by NeONBRAND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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