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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규원 May 20. 2020

진화의 산을 오르다

완만한 능선을 오르는 생명체들

  영국에서는 매년 크리스마스에 영국왕립연구소에서 주최하는 대중과학강연이 열린다. 이 강연은 1825년에 처음 열린 이후에 벌써 200년 가까이 계속되고 있다. 이를 처음으로 제안한 사람이 '전자기 유도법칙' 을 발표한 마이클 패러데이 였다. 그는 역사상 가장 훌륭한 과학 커뮤니케이터 중 한 사람이었음이 확실해 보인다. 그가 제안한 크리스마스 강연은 처음에는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였지만 사람들이 자녀들을 함께 데리고 오게 되면서 강연을 함께 하는 사람들의 연령 폭이 넓어지게 되었다. 젊은 시절 가난으로 인해 맘껏 연구하지 못했던 패러데이는 젊은 세대들에 대한 애정이 더욱 컸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세번째 크리스마스 강연에 직접 강연자로 나선 것을 시작으로 평생 19차례나 직접 강연을 했는데,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어울리는 양초를 주제로 한 그의 강연이 가장 유명했다고 한다. 200년 가까이 계속되어 온 크리스마스 강연에는 매년 정해지는 유익하고 재밌는 주제에 맞춰 세계적인 석학들이 초대되어 자리를 빛냈다. 오랜 역사와 함께 이제는 영국 공영방송인 BBC에서 크리스마스 강연 내용을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방영해 주기도 한다. 나는 영국이 산업혁명 이후 지금까지도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는 이유로 과학자를 우대하고, 일반 대중이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이 높은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크리스마스 강연에는 많은 생물학자들도 강연자로 선정되었는데, 2018년에는 크리스마스 강연에서 있었던 열한 번의 생물학 강연을 주제로 [열 한 번의 생물학 여행] 이라는 책도 출판되었다. 이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생물학자는 1991년 "우주에서 성장하기" 라는 주제로 발표한 리처드 도킨스 다. 그는 1991년의 크리스마스 강연에서 했던 내용을 정리하여 책으로 냈는데, 그 책 제목이 [리처드 도킨스의 진화론 강의] 이다. 리처드 도킨스가 한국에서 번역 출판된 자신의 책 제목을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하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운 출판사 관계자를 칭찬했을지도 모르지만 책 제목을 진화론 강의 라고 지은 것에 대해서는 관계자의 멱살을 잡았을지도 모른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Climbing Mount Improbable' 이며 번역하면 '불가능의 산을 오르다' 정도가 될 것이다. 책의 내용이 분명 진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맞고 본래 강의안을 바탕으로 쓰여진 것도 맞지만 대중과학 강연의 목적을 생각하면 독자들에게 보다 친밀하고 거부감 없게 다가갈 수 있는 제목이 맞을 것 같은데, 과학 자체가 생소한 사람들에게 리처드 도킨스는 유명인이 아닐 뿐더러 대중의 흥미를 끌 가능성이 낮아 보이는 진화론 + 강의 라는 제목을 붙였으니, 내 판단에는 꽤나 과학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 중에서도 생물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만 펼쳐볼 것 같은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원제목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많았다.



  제목에 대한 내 느낌과는 별개로 저자가 책을 통해 제공하는 자료들은 매우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많은 양의 삽화들은 그의 아내가 직접 그린 그림들이었고, 진화와 관련된 어려운 내용들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내가 느끼는 과학의 매력은 확실하게 증명된 것만을 말한다는 것에 있다. 과거의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철학자들은 자연을 통해 관찰된 원리의 일부를 가지고 우주의 모든 원리를 설명하고자 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새롭게 발견되는 자연법칙에 의해 기존의 신념들이 무너지는 것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과학자들은 자신이 아는 한도를 넘어서는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조심스런 입장을 내세운다. 가령 우주의 기원이나 생명의 기원에 관한 자세한 내용들을 모른다고 고백할 수 있다. 지금까지 과학계의 지지를 받고 있는 여러가지 '설' 들은 얼마든지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고 수정될 수 있다.



  진화의 핵심이론이라고 할 수 있는 다윈의 '자연선택이론'은 오랜 시간 검증의 과정을 거치면서도 여전히 살아남은 이론이다. 오래된 창조이론을 믿는 사람들은 자연선택론에 대해 종종 심각한 오해를 하는데, 그들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순전히 '우연히' 어떤 생명체가 만들어진다는 것에 대해 극도의 거부감을 보인다. 지성을 가진 인간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여러가지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모든 생명체가 위대한 신의 계획으로 지음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나 역시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이 의견에 동의하지만) 저자의 입장에서 반론을 해보면, 불가능해 보이는 이 '진화'라는 산을 오르는 것은 급격한 산비탈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반대편의 완만한 언덕을 오랜시간 꾸준히 오르는 것이다. 반대론자들의 말대로 갑작스레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돌연변이와 환경의 적응이라는 긴 시간을 거치며 완만한 산을 오르는 것인데, 자연이라는 의지를 가진 인격체에게 선택되는 것이 아니고 자연스런 과정을 통해 적응하지 못한 개체들이 도태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불가능의 산을 오르는 과정에는 뒷걸음질을 치는 일은 없으며, 산을 오르는 경로도 한가지 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돌연변이는 다양하게 발생할 수 있으며 어떤 형태로 변이가 일어나든지 잘 적응하기만 하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진화를 가상으로 시뮬레이션 할 수 있는 컴퓨터 프로그램도 개발하였다. 이 프로그램에는 몇가지 사례들을 통해 진화의 가능성을 입증하였고, 이론을 강화할 수 있는 증거로 삼을 수 있도록 계속 연구중이라고 한다. 특히 저자는 거미의 거미줄 짓기 형태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를 통해 거미의 진화를 설명하였고, 빛을 수용하고 느끼는 감각기관인 눈이 어떻게 진화되었는지와 날개는 어떤 과정을 거쳐 진화되었는지 매우 흥미롭게 설명한다. 진화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역사적인 과정이라 현재에는 뚜렷한 증거를 찾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그 증거 역시 현존하는 생명체들을 통해 찾을 수 밖에 없는데, 날개의 경우에도 현존하는 개체들의 예를 통해 가능성을 찾고 논리적 순서를 구성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화에는 여전히 많은 의문들이 존재한다. 불가능의 산을 오르는 것은 이런 의문들을 해결하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증거를 하나씩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과정은 자연과 생명에 대한 깊은 관심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리처드 도킨스는 그의 주장에 긍정하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내가 좋아하는 작가이다. 그가 쓴 매우 유명한 책인 [이기적 유전자]는 여전히 국내에서 꾸준히 팔리는 책이다. 나는 그의 글을 좋아하고, 그가 매우 글을 잘 쓰는 작가이자 과학을 대중에서 친숙하게 소개하는 훌륭한 과학 커뮤니케이터라고 생각한다. 그의 책을 읽다 보면 오직 그만이 할 수 있는 유머를 그의 문체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의 글은 무미건조하지 않고 그의 감정이 솔직하게 묻어있어서 더 좋은 것 같다. 진화에 대해서는 연구가 계속될수록 새로운 부분들이 밝혀질 것이고, 지금은 알지 못하는 사실들이 계속 나오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언젠가는 불가능의 산을 오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또한 이런 기초 과학분야는 과학자들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의 관심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더욱 발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첨단과학의 발전과 함께 과학의 대중화 역시 이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Photo by Victoria Dihua Xue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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