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눈이 세상을 덮으면

길도 발자국도 사라진 하얀 세상 앞에서

by 현월안



하늘은 본래 파랗다는 사실을
종종 너무 늦게서야 안다
눈보라가 세상을 덮어
모든 색을 잠시 지워버린 뒤에야
파랑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들판은 말없이 하얗게 몸을 눕히고
길은 스스로를 감춘다
뒤돌아보면
방금 전까지 분명히 있었던 발자국이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눈 속으로 스며든다
내가 믿어온 방향과 확신이
얼마나 쉽게 지워지는지
그때서야 알게 된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날들 속에서
종종 헛것을 붙들고
그것을 희망이라 부른다
확실하지 않기에 더 간절히 매달리고
간절하기에 진실이라 착각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낸다
삶이란 원래 흔들리며
나를 속여가며 이어지는 길인지도,


길도 발자국도 사라진 하얀 세상 앞에서
잠시 멈춘다
더 나아갈 수도,
되돌아갈 수도 없는 자리에서
사방에 어른거리는 것은
지나온 시간의 숨결이다
놓아주지 못한 말들
끝내 다 하지 못한 사랑
미뤄두었던 용기들이
눈발처럼 천천히 내려앉는다


서둘러 길을 덮고, 흔적을 지우고
혼자가 아니라고
너만 길 잃은 것이 아니라고
세상 모든 이에게 말해주려는 것처럼


눈보라는 길 잃은 누군가 앞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조용히 곁에 머물며
조금 느리게 걷자고
잠시 쉬어도 괜찮다고
몸으로 이끌 뿐이다
서두르지 않아도
도착하지 못해도
삶은 이미 충분히 지나왔다는 것을


눈이 그치고 나면
하늘은 다시 파랗게 열린다
그제야 안다
사라진 줄 알았던 길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내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는 것을
발자국은 지워졌지만
걸어온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한바탕 눈보라가 지나간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숨을 고른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삶은 길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라짐을 견디고
계속 살아내는 일임을
하얀 설원이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