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라는 말에 망설이게 되는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가 지난 자기만의 이야기를 하면 꼰대라고 지적을 한다. 너무 쉽게 어떤 사람을 하나의 말로 단정해 버린다. 그 꼰대라는 말 한마디에 더 듣지 않아도 될 것 같고, 굳이 이해하지 않으려는 분위기에 휩쓸리고 만다.
꼰대라는 말은 나이 든 사람, 권위를 내세우는 어른, 혹은 교실에서 학생 위에 서 있던 선생님을 가리키는 은어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 의미는 훨씬 넓어졌다. 이제는 말의 옳고 그름과 무관하게, 듣기 불편한 조언이나 불청객처럼 느껴지는 충고 앞에 쉽게 던져진다.
오래전 그때는 나이라는 이유만으로, 경험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눌러왔던 시간들을 부정할 수 없다.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되는 말이 삶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일반화되었던 시간도 존재한다. 그래서 꼰대라는 말은 일정 부분 거부하는 방어의 말이기도 하다.
어느 순간부터 불편한 말 앞에서 사실 여부를 따지기보다 말하는 이의 나이를 먼저 떠올리고, 말의 진심보다 단순하게 단정해 버리곤 한다. 나이 든 세대는 혹시라도 꼰대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말을 조심하게 되고 젊은 세대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마음의 문을 닫는다. 요즘 사회에는 점점 싫은 소리를 하는 사람이 사라진다. 잘못된 것을 보아도, 옳지 않다고 말하는 용기는 부담이 된다.
말은 사회의 질서다. 미디어 속에서 웃음과 갈등을 위해 반복되는 말은 소중한 소통어다. 드라마 속에서, 예능 속에서 소비된 꼰대라는 말은 가볍게 웃고 넘길 농담이 되었지만, 현실에서는 누군가의 말을 시작도 못 하게 만드는 벽이 된다.
삶은 세대의 틈을 따라 흐른다. 나이 든 사람에게는 시간이 남긴 흔적이 있고, 젊은 사람에게는 아직 열리지 않은 가능성이 있다. 경험은 낡을 수 있지만 지혜는 그리 쉽게 늙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전해지는 방식이 문제일 뿐이다. 가르치려 하지 말고 말은 조심스러워야 하고 건네는 말은 따스해야 할 것이다.
온고지신은 옛것을 익혀 새것을 안다는 것이기도 하고 시간을 연결 삼아 건너는 일이다. 누군가는 손을 내밀어야 하고, 누군가는 그 손을 잡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조금의 어색함과 오해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불편함을 견디는 것이 함께 살아간다는 동행 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러 세대가 한자리에 모였을 때 아름다운 장면은, 누군가가 가르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배움이다. 오래 산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낮은 목소리로 풀어놓고, 젊은 사람이 그 안에서 필요한 것을 골라 담는 순간. 거기에는 권위도 어색함도 없다. 아마도 삶을 향한 애정이 존재하지 않을까 싶다.
이 글을 쓰며 나 역시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지금 이 말은 혹시 또 다른 꼰대의 말이 아닐까 하고. 그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사실이, 어쩌면 아직 희망일지도 모른다. 모두 누군가는 누군가의 앞선 세대이고, 또 다른 누군가의 뒤따르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세대 간의 사랑을 말하려는 용기와 들으려는 마음이 서로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는 일일 것이다.
~~~~~-----==--~~ㄴ
조금 느리더라도, 조금 서툴더라도. 서로를 단정하는 언어 대신 서로를 살피는 살가운 선택할 수 있다면, 다시 그 공간은 살아 있는 곳이 될 것이다. 그리고 삶을 더 따뜻하게 이어주는 온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