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당근 주스에 빠졌다
겨우내 당근 주스에 빠졌다. 집에서 만들어 먹는 당근 주스가 맛있어서 제주 당근 10킬로를 여러 번 주문했다. 당근 상자를 열면 마트에서 보던 반듯한 모습보다,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 것이 흙을 그대로 머금고 있다. 당근은 제각기 모양을 그대로 숨기지 않는다. 주방 한편에 당근 상자를 내려놓으면 은근한 흙내음이 괜찮다. 흙내음은 오래된 기억처럼 마음을 느슨하게 풀어준다.
초겨울부터 식탁의 주인공은 자연스레 당근이 되었다. 주스로 만들어 먹고, 구워 먹고 채 썰어 볶고, 간단히 다른 야채와 생으로 무쳤다. 특별할 것 없는 조리법이다. 그동안 나의 요리에 당근은 조연이었고, 요리의 색감을 맞추기 위한 장식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런데 요리 중심에 놓고 보았더니 식탁 풍경이 달라졌다. 메뉴를 고민할 필요도 없어졌다. 무엇을 더할지 생각하는 대신, 당근을 여러 요리에 듬뿍 넣어 만들고 또 주스로 만들었더니 먹거리가 풍요로워졌다.
밥을 먹고 난 뒤, 꼭 식구들끼리 당근주스를 한 잔씩 나눠 마시는 것은 이제 좋은 습관이 되었다. 당근 주스를 손에 쥐는 순간, 건강한 맛이 마음을 가득 채운다. 건강한 포만감과 행복이 몰려온다.
예전에 읽은 글 하나가 떠올랐다. 한 수도원에서 하루 한 덩이의 빵과 당근주스만으로 식단을 정해 생활했다는 이야기. 절제와 선택을 줄이기 위한 방식이었을 것이다. 먹을 것을 고민하지 않음으로써 생각의 에너지를 다른 곳에 쓰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 이야기가 그때는 다소 극단적으로 느껴졌는데, 당근을 갈아 마시는 요즘에는 조금 이해가 된다. 직접 내린 당근주스를 마시면, 몸보다 먼저 정신이 맑아진다. 복잡한 생각이 잠시 자리를 비운다.
당근 주스가 주는 의미는 작을 수 있다. 그러나 당근이 만들어내는 하루의 결은 의외로 단단하다. 건강한 재료 하나가 중심에 놓이자 하루는 더 이상 복잡하지 않다. 무엇을 먹을지 고민보다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가 더 선명해졌기 때문이다. 건강한 선택으로 군더더기가 사라졌다. 필요 없는 욕심도 불필요한 것도 없이 건강하게 단순해진다.
흔히 삶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 나름 고민을 한다. 먹거리에 신경을 쓴다. 아침마다 당근을 꺼내 씻고, 껍질을 다듬고, 갈아주는 반복적인 일인데도 즐겁다. 당근으로 삶이 건강해지고 나를 움직이게 한다. 삶은 종종 이렇게 사소한 것에 의해 의미를 바꾼다.
삶에서 먹거리는 중요한 것이다. 건강한 재료를 고르고 손수 준비하고 그 의미는 중요하다. 내 몸이 소중하고 가족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가족 모두가 건강해지기 위하여 건강주스를 만들어 마신다. 당근 주스 한잔에는 충분히 괜찮은 만족과 행복이 들어 있다.
행복은 늘 거창한 것 같아도 사실 아주 작은 충족에서 행복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배운다. 흙 묻은 당근을 씻으며 느끼는 손끝의 감각, 주스를 갈 때 들리는 기계음, 컵에 따르는 주황빛의 온기. 이 사소한 장면들이 하루를 지탱한다. 삶이 버거울수록, 이런 단순한 감각이 건강한 현실로 불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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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 주스는 자극적이지 않고 천천히 몸과 마음을 설득하는 맛이다. 그 맛 덕분에 행복하다. 어쩌면 잘 산다는 것은 더 많은 행복을 가지는 일이기도 하지만 나에게 맞는 건강함을 찾는 일이다. 올겨울 온기는 당근이었고 앞으로도 쭉 이어질 것이다. 작은 것에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