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사이가 어느 날

멀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by 현월안




살다 보면 가까운 사이가 어느 날 멀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느 날 문득 말 한마디가 마음에 걸리고, 작은 의미 하나가 거슬릴 때가 있다. 흔히 "제일 친한 사이니까 이 정도는 괜찮겠지." 그러나 친하다는 이유로 건너뛴 예의와 오래 알았다는 이유로 생략된 배려가 관계의 약한 고리를 조금씩 갉아먹는다.



인간은 가까워질수록 서로의 민낯을 보게 된다. 좋은 일과 약점과 상처까지, 또 숨기고 싶은 기억까지 공유한다. 그런데 그 친밀함이 또 무기가 된다. 나만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 배려 대신 날카로운 말로 변할 때, 친함은 보호막이 아니라 칼날이 된다. 누구보다 잘 알기에 가장 아프게 찌를 수 있는 아이러니. 그래서 어떤 관계는 낯선 사람보다 더 깊은 상처를 남긴다. 상처를 준 쪽은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라고 말하지만, 상처는 의도와 무관하게 오래 남는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예의가 필요한 것은 대단한 격식이 아니다. 대단한 존대도 아니고 그것은 상대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 마음의 배려다. 말의 온도를 살피고 가까운 이의 시간이 나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의미다. 예의는 상대를 내려다보지 않고, 앞서가지도 뒤처지지도 않게 나란히 서려는 마음의 균형이 아닐까 싶다.



존중이 사라진 관계는 생각보다 쉽게 무너진다. 오래된 시간은 안전장치가 되어주지 않는다. 오히려 '이만큼이나 함께했으니'라는 말은 합리화가 되기 쉽다. 관계가 지속되는 힘은 기억의 양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조심하고 있는 마음에서 나온다. 관계는 과거로 유지되기보다 현재형이어야 한다.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는 삶의 결이 중요하다. 삶의 속도와 방향이 지나치게 달라지면 이해는 점점 얇아진다. 같은 풍경을 보고도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되고, 함께 웃던 지난 시간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그럴 때 종종 누군가를 탓한다. 변했다고 말하고 서운함을 말한다. 그러나 각자의 삶이 다른 강물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어떤 관계가 멀어질 때, 꼭 서운해할 이유는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연은 소유물이 아니라 흐름이다. 꼭 붙잡고 있다고 해서 영원히 같은 온도로 유지되지는 않는다. 느슨해질 수도 있고, 시간이 흐르면 인연을 놓아야 할 때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변화 앞에서 원망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함께한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한때 그 시절은 분명히 서로의 삶을 건너오게 한 다리였다. 그 다리를 건넌 것만으로도 서로의 역할은 이미 충분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의 마음은 때론 이기적으로 변한다. 상처에 덜 흔들리고, 관계의 숫자에 덜 집착한다. 그리고 삶의 곁은 가벼워진다. 많은 사람을 두는 대신, 서로를 존중할 줄 아는 소수와 함께하게 된다. 그 관계 안에서는 마음이 풍성하고, 자주 보지 않아도 신뢰가 마르지 않는다. 무엇보다 서로의 삶을 침범하지 않아야 할 테고, 가까이 있으되 얽히지 않고, 소유하지 않는 법을 알게 된다.



진짜 친함은 거리낌 없이 함부로 대하는 사이가 아니다. 가장 친한 사이일수록 말을 조심하고, 마음을 살핀다. 그 사람의 약점을 농담으로 쓰지 않고, 상처를 비밀로 지켜준다. 예의는 관계를 옭아매지 않고 오래 함께하기 위해 서로가 보듬어주는 여유가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사랑도 우정도 결국은 존중이다. 존중한다는 것은 사소한 순간의 선택이다. 오늘 내가 어떤 말투를 선택했는지, 상대의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이해할 수 없을 때 조금 더 기다렸는지. 그런 작은 선택들이 모여 관계의 결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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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와 멀어졌다면, 서로를 원망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관계에서는 조금 더 조심하고, 조금 더 따뜻해지면 된다. 가장 친한 사이에게 예의 바른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사랑을 오래 지키는 조용하고도 단단한 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