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를 지키고 있는가
얼마 전 소설 '객주'를 쓴 김주영 작가의 인터뷰 영상을 보았다. "요즘 세대에 꼭 필요한 덕목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예의와 염치"라고 답했다. 그 짧은 문장에서 뭔가 턱 걸리는 게 있었다. 화려한 성공도, 번듯한 스펙도 아닌, 오래된 두 단어. 그러나 곱씹을수록 그것은 요즘 시대를 묻는 질문처럼 들렸다. 예의를 알고 있는가. 염치를 지니고 있는가.
염치의 사전적 의미는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라 풀이한다. 그러나 염치는 체면 유지의 기본인 것이고, 나 스스로를 향한 내면의 기준이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 얼굴이 붉어지는 마음과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을 때 스스로를 돌아보는 힘. 부끄러워하고 미워할 줄 아는 마음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기본이다.
염치가 내면의 잣대라면, 체면은 외부의 거울이다. 체면은 타인의 시선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다. 가끔 또 종종 체면을 위해 움직인다. 회식 자리에서 속으로는 계산서를 걱정하면서도 "오늘은 제가 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식당 계산대 앞에서 서로 카드를 밀어내며 실랑이를 벌이는 풍경과 신발 끈을 괜히 고쳐 매며 머뭇거리는 어색한 배려까지.
체면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체면이 염치를 대신할 때다. 외부의 시선이 내면의 상식을 넘어설 때, 흔히 나 스스로에게 정직하지 못한다. 남의눈을 의식하게 되고 때론 겉치레에 목숨을 건다. 그것은 다른 이의 시선을 향한 연극이다. 속마음과 다른 표정과 진심이 없는 공손함과 모두 내용 없는 형식일 뿐이다. 겉치레는 관계를 잠시 지탱할 수 있을지 몰라도 계속되면 신뢰를 갉아먹는다. 겉치레는 계산된 몸짓일 수 있으니 말이다.
예의는 무엇인가. 예의는 타인을 향한 배려이기 전에 나를 다스리는 일이다. 말 한마디를 건네기 전, 그 말이 상대의 마음을 해치지 않을지 생각하는 마음. 작은 이익 앞에서 양보할 줄 아는 여유와 나의 감정이 옳다 하여도 그것을 함부로 쏟아내지 않는 절제다. 그래서 예의는 잘 다스려 온 품성에서 나온다.
수많은 학자들이 경계한 것은 남을 속이는 일보다 나 스스로를 속이는 일에 대한 역설을 쏟아냈다. 퇴계 이황이 좌우명으로 삼았던 '무자기(毋自欺)'는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다짐이었다. 내 마음이 부끄러워하는 일을 외면하지 않는 것, 잘못을 합리화하지 않는 것, 남이 보지 않아도 나를 돌아보는 것. 염치는 그런 다짐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예의는 그 염치를 바탕으로 자란다.
요즘 시대는 속도에 길들여져 있고, 솔직함이라는 이름으로 거침없는 언어가 사용된다. 그러나 솔직함이 무례함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자유가 방종이 될 때 누군가는 상처를 입는다. 각자의 권리를 외치는 소리는 점점 커지지만, 스스로를 절제하는 목소리는 좀처럼 작아지지 않는다.
예의는 타인을 향한 최소한의 경계이며, 염치는 나를 지키는 마지막 울타리다. 이 두 가지가 무너지면 관계는 금세 거칠어진다. 염치를 잃으면 무례가 되고, 예의를 잃은 솔직함은 폭력이 된다. 인간의 도리는 일상의 작은 선택에서 시작된다. 줄을 설 때 한 발 물러나는 일, 약속을 지키는 일, 사과할 줄 아는 일. 그 소소한 일 속에서 품위가 자란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책임이 깊어지는 일이다. 세월이 쌓일수록 말이 고급스러워져야 하고, 판단은 신중해져야 한다. 염치는 더 세밀해지고, 예의는 더 갖추어야 한다. 젊음이 실수로 용서받을 수 있다면, 연륜은 여유로 고급스럽게 포용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예의와 염치는 겸손해야 하는 일이고 나를 바르게 세우는 힘이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은 스스로를 비우고 내면을 채우는 일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자신을 속이지 않는 사람은 타인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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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화려한 것보다 진심이 담긴 고요하고 아름다운 품위를 더 오래 기억한다.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마디, 조용한 배려, 묵묵히 곁을 내어주는 일이 삶을 아름답게 한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아는가. 예의를 지키고 있는가. 종종 또 때때로 그 화두를 확인하며 생을 이어가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