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채워지고 비워지고

삶은 매번 시간과 마음을 정리하며 산다

by 현월안





봄이 되면 집안 구석구석 정리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옷장을 정리해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결심은 늘 그렇듯 마음속에서만 있다가 시간이 흘렀다. 더 이상 미루면 안 되겠다 싶어서 집안에 있는 옷장을 홀딱 뒤집었다. 마음을 다잡고 옷장 속에 모든 옷을 꺼내어 거실 바닥 위에 펼쳐 놓았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옷이 쏟아져 나왔다. 계절이 바뀌어도 손이 가지 않는 옷, 몇 년째 걸려만 있는 옷, 그리고 잊고 있었던 옷들까지. 그렇게 바닥 위에 펼쳐진 옷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많아도 너무 많았다. 옷장이 아니라 시간의 서랍을 열어본 것 같았다.



버리고 비워야 정리가 된다는 것을 머리로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삶에서 안다는 것과 한다는 것 사이에는 시간이 흐른다. 그 시간을 건너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어떤 옷은 몇 년 동안 한 번도 꺼내 입지 않았으면서도 그대로 걸려 있다. 언젠가는 입을 것 같아서, 아직 버리기에는 아깝다는 생각 때문에.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옷을 붙잡고 있는 것은 그때의 기억이다.



기념일에 남편이 사 주었던 옷이 있다. 시간이 지나고 자주 입은 옷은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옷장에 그대로 걸어 두고 있었다. 옷 자체보다 그날의 기억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 옷을 보는 순간, 함께 걸었던 거리와 웃음 섞인 대화가 떠오른다. 그날의 공기와 시간까지도 옷감 사이에 조용히 접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옷을 정리하는 일은 옷에 묻어 있는 시간과 마음을 하나씩 꺼내어 바라보는 일이다. 흔히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에 기대어 잠시 머물던 나의 시간을 놓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끔은 옷을 들춰보다가 한참을 바라보기도 한다. '아, 맞아. 그때 이 옷 참 좋아했었지' 잊고 있던 기억이 조용히 돌아온다. 어떤 옷은 설렘을 데려오고, 어떤 옷은 그때의 분주한 하루를 떠올리게 한다. 옷장은 그저 옷을 걸어 두는 곳이기도 하고 또 삶의 조각들이 머무는 기록이다. 그래서 정리는 오래 걸린다. 물건을 고르는 일보다 마음을 고르는 일이 더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좋아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끌어안고 살 수는 없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많은 것들을 품지만, 또 많은 것들을 놓아주며 살아간다. 계절이 지나면 나무가 잎을 떨구듯이 말이다. 나무는 잎을 떨구고 다음 계절을 위해 공간을 비우는 것이다. 인간의 삶도 아마 그와 비슷할 것이다.



옷을 하나씩 접어 내려놓으며 이제 안다. 어떤 것은 나와 함께 오래 머물렀지만 이제는 그 역할을 다했다는 것을. 한때 소중했던 나의 물건을 떠나보내는 것은 기억이 사라지는 것이라기보다 내 안에 남은 기억이다.

그래서 마음을 조금 가볍게 먹어 보기로 했다. 그 옷이 내 삶의 한 장면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그 시간을 고맙게 생각하고 이제는 옷을 보내 줄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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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장이 조금씩 비워지자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공간이 넓어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마음속에서 무언가를 내려놓았기 때문일까. 무엇이든 가득 채워 두면 숨이 막힌다. 때로는 비워 두어야 새로운 것이 들어올 자리가 생긴다. 비워진 공간 사이로 여백이 생겼다. 그 여백을 보니 여유가 느껴졌다. 언젠가는 다시 옷이 채워질지도 모른다. 삶은 늘 그렇게 채워지고 또 비워지는 반복이니까. 삶은 매번 시간과 마음을 정리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