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에서 멀어진 고요한 시간

모란은 벌써 지고 없는데 먼 산에 뻐꾸기 울면

by 현월안




라디오에서 '모란동백'이 흘러나온다.


"모란은 벌써 지고 없는데 먼 산에 뻐꾸기 울면

상냥한 얼굴 모란 아가씨 꿈속에 찾아오네

세상은 바람 불고 고달파라 나 어느 변방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나무 그늘에

고요히 고요히 잠든다 해도

또 한 번 모란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익숙한 멜로디는 오래된 기억을 두드리고 조용히 가슴을 흔든다. 오늘 내 마음이 그래서 그런지 왠지 그 노래가 더 슬프게 들린다. 아마도 어떤 나이가 되면 사람의 마음속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잔잔한 파문이 생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 '변방'이라는 그 노래 속 단어가 오래 남는다.


변방이라는 말이 쓸쓸하다. 중심에서 조금 비켜선 자리이고 사람들이 떠난 뒤에 남는 고요한 공간이다. 누군가의 발길이 드물어지는 시간의 끝자락 같은 느낌이다. 변방에는 바람이 먼저 도착하고, 해 질 녘의 노을이 오래 머문다. 그곳에는 웃음보다 고요하고 사람의 목소리보다 바람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흔히 변방은 어떤 패배나 밀려남의 자리로 생각하기 쉽다. 중심에서 밀려난 자리 젊음의 중심에서 비켜난 자리, 또 세상의 속도에서 조금 뒤처진 자리라고 여긴다. 그러나 변방은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밀려나는 곳이라기보다 어느 날 문득 도착해 있는 곳인지도 모른다. 어느 날 문득 도착해 있는 곳은 젊은 날에는 보이지 않던 시간이 그제야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삶은 중심을 향해 달려가기도 하지만, 천천히 원을 그리며 변방을 향해 넓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요즘 내가 떠올리는 변방은 구순을 넘기신 시부모님이 계신 곳이다. 남편의 고향집에서 두 분은 아직 시설에 가지 않고 서로 의지하며 살고 계신다. 몸은 여기저기 불편하고 기억도 예전 같지 않지만, 두 분은 여전히 같은 지붕 아래에서 하루의 시간을 나란히 건너고 있다. 그 모습을 바라볼 때면 마음 한쪽이 조용히 숙연해진다.



흔히 삶을 앞으로만 흐르는 강처럼 생각한다. 더 멀리 더 높이, 그리고 더 넓게 뻗어가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노년의 시간은 그와는 전혀 다른 시간이다. 거기에는 경쟁도 속도도 없고, 대신 아주 느린 걸음으로 하루를 지켜내는 느린 시간뿐이다.



몸은 점점 약해지고, 기억은 희미해지고, 어제보다 더 조용해진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삶은 여전히 계속된다. 아침이 오고 밥을 먹고 창밖을 바라보고, 저녁이 되어 다시 잠자리에 드는 느린 하루가 이어진다. 그 지루하고 고요한 시간이 노년의 시간이다. 그리고 그다음 맞이하게 되는 시간일 것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시간이다. 그 누구도 그 길을 대신 걸어줄 수 없다. 인간은 모두 혼자서 그 길을 건너가야 한다. 그래서 죽음을 생각하면 왠지 변방이라는 의미를 떠올리게 한다.



삶의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인간은 점점 더 조용한 세상으로 들어간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지고, 세상의 속도에서 멀어지고, 또 그 소중히 머물던 자리에서도 멀어진다. 그 길은 마치 먼 변방을 떠돌다 어느 나무 그늘 아래 이르는 길처럼 말이다.



젊은 날에는 잘 모른다. 인간은 너무 많은 것을 원하고 너무 많은 곳을 향해 달려가느라 지금 곁에 있는 것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하지만 삶의 끝자락에 가까워질수록 사람은 점점 더 고요해지고 작아진다. 삶의 중심에서 밀려난 것도 모른 채 말이다.



"또 한 번 모란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이 말은 연인의 부탁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조금 다르게 들으면 한 인간이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인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떠나는 사람이 남겨두고 싶은 작은 소망, 그것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잠시라도 머물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인간은 기억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사랑했던 사람들은 그래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함께 보냈던 시간이 마음속 어딘가에 조용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ㅇ


오늘은 변방이라는 말이 조금 슬프게 들리는 날이다. 그 변방이 의미가 천천히 시간을 지키어 깊어지리라고 바래본다. 그리고 누구나 언젠가는 그 변방의 길 위에 서게 된다. 떠돌다 떠돌다 어느 나무 그늘 아래 이르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