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때론 공정하지 않더라도
요즘 어떤 뉴스는 마음의 균형을 흔들어 놓는다. 전직 부기장이었던 김 씨는 한 아파트 복도에서 직장 동료였던 항공사 기장 A 씨를 흉기로 찔러 살해했다. 범인 김 씨는 A 씨를 포함해 앙심을 품은 동료 4명을 살해하려고 마음을 먹고 수년 전부터 미행을 했다고. 그런데 뉴스 화면에 비친 범인 김 씨는 격앙된 목소리로 이렇게 얘기한다. "악랄한 기득권이 한 인생을, 개인의 인생을 파멸시켰다"며 '휴브리스' 그리고 또 미친 '네메시스'라고 외친다. 휴브리스와 네메시스는 그리스 신화와 철학서에 나오는 용어다. 휴브리스는 '인간의 오만', 네메시스는 '신의 응징'을 의미한다. 무엇이 그를 분노하게 했을까.
범인 김 씨는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오만과 응징을 말했지만, 그 말은 인간이 얼마나 쉽게 자기 서사에 갇히는지를 보여준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고통을 중심에 두고 세상을 해석한다. 대부분 억울함은 크게 해석되고 상처는 사실보다 더 큰 이야기로 부풀어 오른다. 세상을 살다 보면 누구든 그 이야기 속에서 한동안 갇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으로 남기 위해 반드시 붙들어야 하는 것은 그 균열의 순간이다. 아무리 억울하고 고통스러워도, 타인의 생명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최소한의 마지막 의미 부여. 그것은 규범이기 이전에 나를 지키는 마지막 울타리다. 그 울타리가 무너질 때 그저 이도 저도 아닌 파멸의 일부가 될 뿐이다.
삶은 때론 공정하지 않다. 관계는 어긋나고 노력은 보상받지 못하고, 어떤 날은 이유 없이 내가 세상에서 밀려난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 불균형 속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낸다. 분노를 삼키고 때로는 울고, 때로는 포기하면서도 타인을 향한 마지막 선은 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고통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든 그 뉴스처럼 엄청난 일은 이해할 수 없다. 어쩌면 인간은 모두 작은 오만을 품고 살아간다. 나의 고통이 특별하다는 믿음과 나의 억울함이 더 크다는 확신. 그러나 그 생각이 자라나 스스로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 순간, 세상은 왜곡되기 시작한다. 그 왜곡을 바로잡는 것은 거창한 철학도 아니고 아주 단순한 자각이다. 나도 때론 틀릴 수 있다는 인정이 아닐까 싶다.
시간이 지나면 상처는 희미해진다. 완전히 사라지지 않더라도, 그것을 견디는 방법을 배운다. 그래서 인간의 삶에는 회복이라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 가능성을 스스로 가지는 선택. 다른 이의 삶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삶까지도 되돌릴 수 없는 어둠으로 밀어 넣지 않기 위한 그 깊은 고민.
요즘 질문이 아마도, 인간은 무엇으로 인간다운가라는 물음일 것이다. 그것은 성공도 명예도 중요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무엇을 선택하는가, 그 선택 앞에서 어떤 선을 지키는가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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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세상이 위태로워 보일수록 내가 더 단단해져야 한다. 타인을 향한 분노이기보다, 나를 향한 성찰로. 그리고 그 성찰이 다시 일상으로 관계로, 그리고 서로 해치지 않는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것이 요즘 불안한 시대를 건너는 조용하고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