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시간이 나면 우리 동네 모습을 관찰하는 것을 즐겨한다. 커피 한잔을 들고 걷기도 할 겸 해서 산책을 하고 동네 구석구석 제법 볼거리가 많다.
요즘은 내가 사는 동네는 고깃집과 카페가 많아도 너무 많다. 수많은 가게들이 예쁘게 단장을 하고 저마다 경쟁을 한다.
얼마 안 돼서 딴 업종으로 옷을 갈아입는 가계를 보면, 어떤 사연이 있길래 그렇게 쉽게 가게를 접었다 폈다 할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주위의 상권을 보면서 생활 경제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대충 짐작으로 알게 된다.
어느 곳이 맛집이고 어느 가게가 손님이 분비는 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생활 반경 안에 먹거리가 가득하고 대부분 음식점이 많다.
솥뚜껑 위에서 지글지글 끓고 있는 삼겹살과 김치가 어우어져 맛있게 유혹을 한다. 양질의 재료로 양념이 잘 된 고기는 정말 맛있다.
나이 들어가면서 고기보다는 야채를 즐겨 먹게 되었다. 소화가 잘 되는 것을 선호하게 되면서, 어느새 채식주의자가 된 것처럼 야채가 들어있는 음식을 찾게 된다,
누군가와 함께 외식을 하거나 여럿이 지인들과 회식을 할 때도 고기가 들어가 않은 메뉴를 찾기가 힘들다.
요즘 식성이 고깃집을 가더라도 고기는 아주 조금 먹고, 야채위주로 손이 가는 걸 보면, 속도 편해서 그런지 야채위주로 먹게 된다.
여러 사람과 고기를 먹을 때도 고기에 관심을 덜 가져서 그런지 열심히 내가 고기를 구워 준다. 타지 않게 골고루 익혀서 고기 굽는 담당을 한다.
고기를 조금만 먹고 야채를 먹으면 적당히 소식을 하게 돼서 속이 오히려 편하고 좋다.
의도한 것도 아닌데 어느덧 어설프게 요즘 채식주의자 흉내를 내고 있다.
나의 주변에 있는 지인은 완벽한 채식주의자다.
동물 사육과 식육의 윤리 문제까지 거론을 하는 걸 보면, 윤리 도덕까지 마음이 동해서 그리 실천하는 사람이다.
살충제 성분이 검출된 달걀이 문제가 되면서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까지 그녀는 고민을 한다.
폭력적이고 반 윤리적으로 동물 사육이 문제라며 계란까지 문제 제기를 하는 걸 보면, 닭의 알을 얻기 위해서 사방이 비좁은 공간에 닭들을 욱여넣고 사육을 하는 환경은 충분히 공감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녀가 고민하는 것들이 모두 가슴으로 이해가 되는 것이, 존엄과 생명존중을 동시에 알려주는 최소한의 윤리 같아서 숨죽여 듣곤 한다.
그녀는 동물과 윤리 도덕을 고민하는 것들을 가지고 전국적으로 목소리를 낼 때에도, 그곳 현장에 조용하게 참여하곤 했다. 윤리적으로 생명의 존엄을 지키고자 하는 일들이, 어쩌면 당연한 일을 하는 것처럼 그녀의 일상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현장에서 조용히 구호를 외치며 생명체와 함께 이 세상에서 공존하고자 하는 의미를 찾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신문을 읽다가 보았더니 광우병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을 하는 것을 유익하게 알게 되었다.
광우병은 소를 과하게 살 찌우기 위해 소의 뼈와 내장을 사료로 먹이는 것이, 광우병의 또 다른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같은 동물의 내장을 급성장을 위하여 먹이가 되고, 악순환의 고리가 결국 인간에게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한우는 비싸고 수급 조절을 위해서 값이 싼 고기를 수입해야 하는 자본 유통의 원리가 있지만, 육식을 선택하는 것도 취향의 선택이라고 하기에는 어쩌면 만족하며 선택할 수는 없는 듯하다. 세상에 먹거리는 많지만 맘 놓고 선택할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산속에서 자연 친화적으로 삶면서 풀뿌리를 캐서 먹지 않는 한, 내겐 일상에서의 채식은 작은 일부분의 실천이고 만족일 뿐이다 사실 식구들 식단을 생각하면 채식만을 완전히 선호할 수는 없고, 영양의 균형을 위해서 적당히 육식을 식탁에 올리게 된다. 육식이 주는 맛은 그 무엇과도 비교가 되질 않는다. 육식이 가진 고유의 달콤한 맛은 대단한 맛이다.
우리가 아마도 다른 생체를 모조리 먹으면서 살아갈 힘을 내고, 그것을 먹으며 행복을 느끼는 존재로서의 겸손함은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가끔 아주 작은 의미라도 윤리 도덕과 마주하며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 하더라도 결국 인간은 점점 대단히 우아하고 사치스러운 포식자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