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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월안 Jun 26. 2024

30년 만에 만난 여고동창

"이젠 삶이 평온해"라는 친구의 말이 듣기 좋았다



   수십 년 만에 여고 때 단짝이던 친구를 만났다. 

학교를 졸업하고 소식을 알 수 없어서

소문만 무성했던 친구였는데 둘러 둘러서 연락이 닿았다.

약속을 정하고 만나서 이야기하자는 말에 너무 반가워서 그 자리에서 그만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잊고 지냈던 나의 풋풋했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고, 기억 어딘가에 있는 지난 시간

새록새록 떠올랐다.



   딸부잣집 딸이었던 친구는 공부도 얼굴도 몸매도

예뻤다. 모든 것이 풍족하지 않았던 그때에 친구는

다른 지역으로 발레를 배우러 다닐 만큼 

발레에 소질이 있었다.

그때 붙여진 친구의 별명이 '발레'였다.

교실 바닥에서 시도 때도 없이 발레 동작을 하며 다리를 쫙 찢고는, 시선은 도도하게 표정을 지으며

해맑게 웃던 그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우리 함 풋풋했던 소녀감성으로 이유 없이 까르르 웃음 짓던 그때를 친구는 기억하고 있을까?

데카르트, 아퀴나스, 디오게네스, 아우구스티누...

철학을 좋아하시던 국어선생님의 이해 덕분에 철학을 논하고 함께 고민하며 좋아하던

철학자들맘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까?

우리는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도 철학을 하며 

도도하게 살자던 친구철학의 삶을 살고 있을?

어떻게 나이 들었을까? 옛날의 예쁜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을까? 온갖 상상을 해 보았다. 

톡톡 튀는 파릇한 시간을 함께했던 지난 소중한 시간들이 불현듯 스쳐 을 설쳤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친구는 지방에 있는 간호대학 간호학과 진학을 했고 학교를 마치고는 곧바로 미국사람을 만나 결혼을 해서 미국에 산다는 소식뿐

그 이후로 소식을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 전화 통화에서 미국이 아닌 한국에 살고 있어서 반가웠고 만나서 이야기해야 한다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통화를 마쳤다.

친구가 지금 사는 곳은 전라남도에 있는 시골마을 공기 좋은 곳이라고 다. 서울에는 올 기회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친구 언니들이 서울에 여럿 살고 있고, 가끔 다녀간다는 말에서 내심 반가웠다. 

우리가 드디어 만나는 날~

약속 장소에 미리 가서 기다렸다.

마치 연인을 기다리는 것처럼 설레었다.

출입구 쪽을 바라보고 앉아서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한 사람이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낯익은 실루엣

속으로

"그래 맞아~ 발레..."

살짝 살이 찐 모습이지만 목소리에서 그때의 익숙함 몰려왔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 알아보고

우린 서로를 꼭 안아주었.

친구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을 반가움의 눈물을 찍어내며 서로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오랬만이다 그렇지?~"

친구의 눈물이 쉬 그치질 않았다.

반가움을 넘어선 눈물이라고 할까.

충분히 진정되기를 기다려 주었다.

주문해 놓았던 냉커피의 얼음이 다 녹아있었 커피는 안된 채 멈춰있는 시간처럼 둘은 아무 말이 없다.

참을 시간이 지났을 무렵 친구가 말문을 열었다.

"소식 알고 있었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으로 유학을 온 미국사람을 만나서 미국으로 따라갔고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의 말만 믿고 결혼하고 보았더니 모든 것이

거짓이었고 정신마저 온전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의 폭력과 무능력은 삶이 지옥 같았고

아들 하나를 낳았지만 아이를 두고 도망치듯 3년 만에

한국으로 들어왔다고...

그때의 악몽이 되살아났던지 몹시 괴로워하는 표정에서 이미 친구 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만큼만 이야기해도 너머의 삶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친구의 미국이야기는 더 이상 꺼내지 않아도

그 삶의 모든 것을 안 것처럼 이해되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연고도 없는 지방 소도시에 지원을 해서 보건소 근무하는 공무원으로 오랜 세월 지내다가

이른 퇴직을 했다는 말을 나지막이 들려준다.

그곳에서 공무원을 만나서 재혼을 하고

딸아이 하나를 낳아서 세 식구가 재밌게 살고 있다는

말에서 우리 대화는 평온하게 이어갔다.

하루에 세 번 버스가 들어가는 오지 마을에 살고 있다는

말에서 우린 서로 이유 없이 웃었다.

그리고는

"이젠 삶이 평온해~"라고 하는 친구의 말에서 안심이 되었다.

그 옛날 우리가 함께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또 들춰내고

웃다가 울다가 맘껏 시간여행을 했다.



   미국에서 받은 상처가 너무 커서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는 말과 애써 연고도 없는 곳에서 숨어 지내고

싶었다는 말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 무거운 짐이 가벼워지면 좋겠고

충분히 공감을 하고 친구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누구나가 크고 작은 상처를 가지고 살아간다.

애써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친구가 더 이상 지난 상처를 들춰내지 않기를 바라고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리고 너무 잘 살아온 훌륭하고 잘 견뎌내서

다행이라고 칭찬해 주었다.

친구와 이야기 말미에 고등학교 때 국어선생님 덕분에 우리가 서로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그 옛날부터 "철학을 알았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한바탕 웃다가 헤어졌다.

그래 삶이 별거야! 우리 다음에 만나면 충분히 서로 공감해 주고 그렇게 웃으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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