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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는 날엔

감정이 차분하게 머문다.

by 현월안



요즘 장마기간이다.

서울엔 비가 오는 날과 흐린 날이 반복된다.

언제부턴가 비가 오는 날이 그리 싫지 않다.

비가 오는 날이면 마음은 묘하게 잔잔해지기 때문이다. 평소에 빠르게 돌아가던 일상도 복잡한 생각도, 그 순간만큼은 비의 리듬에 맞춰 느려지고 고요해진다.

비가 오는 틈새를 타고 어딘가 모르게 잔잔하게 스며드는 감정이 있다. 말 그대로 편안하게 살짝 내려앉은 기분이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비 오는 날에는 부드럽고 잔잔한 느낌이 있다.



느낌많이 가진 사람에게 날씨는 정서적으로 미세하게 영향을 미친다. 비가 오는 날엔 햇빛을 가리고 빛을 낮추어 주변을 차분하게 만든다. 햇빛이 줄어들면 생리적으로 기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하지만 단지 날씨 탓, 기분 탓으로만 감정을 설명하기에는 사람의 감정이 훨씬 더 복잡하고 섬세하다. 그렇다고 비가 오는 날이 무작정 우울하거나 부정이지 않다. 감정은 파도처럼 오르내리며 매번 한 곳을 향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 오는 날 느껴지는 시크함은 우리 마음이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이다.

때로는 조용하게 비 오는 날이 필요할 때가 있다.

잔잔한 감정의 여백을 허락하는 시간이 때문이다.

비가 오는 날에는 혼자만의 시간을 만들어준다.

비가 오는 창밖을 보며 커피를 마시고, 빗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고 잔잔하게 흐르는 순간들이 마음을 다독이고 위로가 된다. 잠시 생각을 멈추고 내 안의 소리를 듣는다.


♧♤


빗소리를 들으면 마치 과거의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지난 그때의 모든 기억은 빗소리를 타고 되살아난다.

감정은 기억에 뿌리를 둔다. 그리고 기억은 감정의 변화에 쉽게 흔들린다. 비가 내리는 날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내면의 감정과 기억을 일깨우는 그 무엇인가가 되는 셈이다.

비 오는 날, 살짝 우울한 감정은 사실, 단순하게 가라앉는 기분이 아니다. 생각의 틈, 기억의 조각, 감정의 그림자가 섞여 만들어낸 중요한 감정이다.

슬픔과 평온함 사이, 외로움과 위로 사이에서 진동하는 그 중간의 느낌쯤 되는 것이다. 살짝 시크함은 어떤 면에서 인간이기에 느낄 수 있는 섬세한 감정이기도 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외부 공간과 살짝 거리감을 둔다. 거리에는 사람이 적고, 창문은 닫게 되고, 실내는 고요해진다. 시끄러운 무언가로부터 멀어질수록 자연스럽게 내면으로 향한다. 평소에 무심코 흘려보내던 생각들이 머리 위에 내려앉는다.

내가 누굴까.

지금 괜찮은 걸까.

어디쯤 가고 있을까,

마음들이 조용히 고개를 든다. 비 오는 날은 외면을 잠시 닫게 되고 내면을 조용히 열게 된다.



사실, 인간은 완전히 밝고 명랑한 상태만을 추구하며 살아갈 수 없다. 조용한 시간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불완전함을 인정하며 멈춤의 가치를 되새긴다. 비 오는 날의 여유는 그런 면에서 일종의 정서적 휴식이다.

완전히 가라앉는 것도, 떠오르는 것도 아닌 그 중간 지점에서 자기 자신과 만난다.

바쁘고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 잠시 멈춰, 나의 감각을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내가 가지는 살짝 가라앉은 감정은 섬세하고 고급스러운 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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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 오는 날을 즐긴다.

조금 느려져도 괜찮고, 약간 울적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날. 나 자신과 솔직해지는 소중한 시간이다.

사람의 감정이 얼마나 아름다운 감정의 존재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는 날이,

비가 오는 날이기도 하다.

그날은 내게 알맞게 다정해지는 날이다.

나의 감정도 차분하게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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