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노하라 마사타케' 철학서
홀로세의 끝자락에서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인류세라고,
화산의 폭발이나
운석 충돌에 맞먹는 흔적을
인간 스스로가 지구의 지층 위에
남겼기 때문이다
크뤼천이 말했듯,
증기기관의 검은 숨결,
핵실험의 눈부신 섬광은
행성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차크라바르티는 묻는다
단순한 과학의 시대 구분이 아니라
존재론의 문턱이다
인간은 더 이상
자연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이미 지질학적 존재,
지구의 암석과 대기, 바다와 함께
역사라는 거대한 무대에 새겨져 있다
칸트가 꿈꾸던 인간의 도덕적 삶과
동물적 삶의 갈등은,
이제 새로운 세상에 들어섰다
이성이 자연을 떠난 자율이 아닌
자연의 고통을
감당해야 할 의무로 바뀌었다
도덕적 삶이
동물적 삶을 책임져야 하는 시대,
행성시대라 불린다
스푸트니크가 우주로 솟구치던 밤,
아렌트는 두려움과 깨달음을 보았다
'인간이 지구로부터 이탈했다'
그 이탈은
오히려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또렷이 보여주었다
지구라는 거대한 사물,
행성 그 자체가 인간의 조건임을
세상은 더 이상 인간의 세상이 아니다
모래벌레가 사막을 파괴하면서도
생태계를 창조하는 것처럼,
지구의 사물들은 인간과 얽혀서
새로운 세상을 빚어낸다
'듄' 속 황금의 길은
인간에게도 남겨진 길이다
죽음을 각오한 합체,
인간과 사물, 행성과의 화해 속에서
새로운 시간을 열어가는 길,
'인류세의 철학'은 속삭인다
인간은 여전히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타락의 역사 위에서
또 타락을 반복할 것인가,
아니면 붕괴의 잿더미 위에서
다시 생의 길을 열 것인가
지구는 더 이상 배경이 아니다
바다의 파도, 빙하의 눈물,
플라스틱 속에 갇힌 새의 몸짓,
코로나의 그림자
모두가 인간이 가진 조건이다
죽어갈 것인가,
살아볼 것인가,
인류세는 단 하나의 질문을
끝없이
인간의 귀에 때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