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론성지에 이미 가을이다
바람은 여름의 흔적을 오래 움켜쥐고,
여전히 한낮 무더위 속에서
뜨거움을 감지한다
성당 사람들과 묵주를 손에 쥐고
배론성지 여행을 갔다
그 길은 넓은 들판을 지나
충북 깊은 골짜기, 배론으로 향했다
배론의 골짜기는 배 밑바닥을 닮았다고,
깊고 좁은 그 골짜기 속에
얼마나 많은 눈물과 신앙의 언어가
가라앉아 있었을까
황사영의 글은 단지 종이가 아니라
시대의 고통을 담은 철학적 외침이었고,
박해를 피해 숨어든 이들의 삶은
신앙과 생존의 경계에서 묻는 듯했다
그곳에서 신학교의 불빛이 처음 켜졌고,
김대건 신부의 뒤를 잇던 젊은 사제들이
산골의 흙을 포옹하듯 잠들어 있다
기도를 하고
묵묵히 나를 비추어 보았다
울적했던 마음은 바람에 흩날려
마치 낙엽이 흙으로 돌아가듯,
조용히 가라앉았다
문득 눈을 들어 보니,
나무들은
이미 계절을 갈아입고 있다
붉은빛은 고통을 닮아서 곱고,
노란빛은 희망을 닮아서 따스하다
가을은 그렇게
아픔을 아름다움으로 바꾼다
한가운데 펼쳐진 수목은
또 다른 수목원 같았다
나무의 생명이 뿜어내는 숨결은
낡은 하루를 씻어내고
푸른 내일을 알려주는 듯하다
배론성지에 가을 와 있다
가을은 참 예쁜 계절이다
신의 손길이 빚은 철학,
모든 상처를 색으로 덮고,
모든 허무를 열매로 맺히게 하는
영원한 순환의 연결,
가을은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가을은 언제나 사람 곁에 온다
배론성지 가을이 예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