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보기 드문 맑은 영혼
인생을 살다 보면 한 사람의 선택과 헌신이 한 가족의 역사를 바꾸어 놓는 순간을 목격하게 된다. 나에게는 그런 순간을 온몸으로 살아낸 고종 사촌 동생이 있다. 그녀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한 개인의 이력이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가 어디까지 사랑할 수 있고 또 어디까지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가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고모는 젊은 나이에 뇌출혈로 쓰러졌다.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시간의 바깥에 남겨진 아이 같은 존재로 오랜 세월을 살아야 했다. 그때 고모의 자식들은 아직 너무 어렸다. 큰딸은 막 성인이 될 무렵이었고, 막내는 초등학교에 불과했다. 그들의 삶은 갑작스럽게, 깊은 강을 건너는 듯한 고통의 시기로 들어갔다.
그때, 사촌동생 둘째가 그 모든 짐을 짊어졌다.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누구보다 빛나는 사람이었던 그녀는, 인생의 가장 귀한 시간을 공부와 간호라는 두 개의 불가능해 보이는 무게 속에 묶였다. 하지만 그녀는 의식 있고 똑똑한 사람이 책임지려는 결의가 있었다. 작은 방 한편을 수학 교습소로 만들어 아이들을 가르치며 생계를 이어갔고, 동시에 병든 엄마 곁에서 단 한 번도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그 선택은 단순한 가족으로의 책임을 넘어선 것이었다. 긴 세월 동안 한 인간을 간호하는 일은 자기 자신을 소모하고, 젊음을 희생하는 길이다. 그러나 그 길을 마치 자신이 가장 당연히 서야 할 자리인 것처럼 받아들였다. 그 맑은 미소와 담담한 행동은 주변을 의식하지도 않고 당당히 그 삶을 이어갔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 사촌 동생은 결혼을 했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녀의 남편은 그 무거운 상황을 이해해 주었고, 혼수라 불리기엔 너무나 큰 짐인 환자를 모시는 조건을 받아들였다. 귀한 인연이었다. 결국 고모는 딸의 지극한 정성 속에서 23년을 살고, 세상을 떠났다. 남겨진 것은 간호의 고단한 기억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품격과 사랑의 깊이에 대한 증거였다.
종종 책임이라는 단어를 무겁게 여기지만, 사실 사랑과 다르지 않다. 누군가의 곁에 끝까지 남아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높은 형태의 사랑이다. 사촌 동생이 보여준 23년은 인간의 존엄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는 길고도 깊은 대답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지금도 수학 교습소를 운영하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 교실의 칠판에는 단순한 수학 공식만이 아니라, 삶을 살아내는 힘과 희망이 함께 새겨져 있다. 그녀의 교습소가 크게 번창하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가 걸어온 길이 절대 헛되지 않았다.
사촌 동생은 눈웃음이 참 예쁜 사람이다. 난 가끔 그 맑은 미소를 떠올린다. 영혼이 맑은 자만이 지을 수 있는 빛나는 웃음이다. '어려운 길을 어찌 지나왔을까' 곁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한 마디씩 건넨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그 길을 그저 받아들이고 묵묵히 걸어온 것이라고 해맑게 말한다.
23년의 헌신은 고모와 함께 한 시간이었고, 그것은 '사람이 사람에게 무엇이 될 수 있는가'를 가르쳐 준 시간이었다. 그녀의 23년 이야기가 점점 희미해져 간다. 사촌 동생의 그 맑은 영혼, 앞으로 세상에서 귀하게 쓰일 것이다. 고생 많았어 윤정작가.
이 이야기는 브런치 스토리 작가 '날마다 하루살이' 필명을 쓰는 작가의 실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