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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차와 고요한 시간

보이차 맛은 깊으면서도 오묘하다

by 현월안




여름이 지나고 바람 끝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면, 나는 자연스레 보이차를 꺼낸다. 찻잎이 뜨거운 물속에서 천천히 숨을 트며 빚어내는 짙은 갈색 빛. 그 빛이 유리 다관을 가득 채울 때면 마음도 고요히 가라앉는다. 마치 오랜 시간을 품은 산속의 안개가 잔 속으로 스며드는 듯한 기분이다.



보이차의 맛은 깊고 오묘하다. 첫 모금은 약간의 떫음이, 두 번째는 부드러운 단맛이, 세 번째는 깊고 은은한 향이 맴돈다. 그 깊이가 또 한결같지 않다는 것이 매력이다. 보이차를 구입할 때마다 미세하게 다른 맛을 내고 발효의 온도와 시간에 따라 다르고 잎의 연령과 산지의 바람이 만들어낸 차이가 다르다. 인생이 그렇듯, 같은 보이차라도 모두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어서 그 작은 차이를 알아보는 재미도 또 재미다.



차를 마시다 보면 자연스레 다기(茶器)가 늘어난다. 찻잔의 크기가 다르고, 다관의 모양이 모두 예쁘다. 찻상 위의 작은 집기들을 하나 둘 모으다 보면 어느새 작은 살림살이가 차려진다. 그 속엔 나의 욕심이 잔뜩 들어있다. 어느 순간, 보이차 맛이 아닌 다른 것에 너무 많은 욕심을 가지다 보면 차의 고요함을 방해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지는 법도 적당히 해야 하고 내려놓는 법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는 더 이상 욕심내지 않기로 했다. 적당히 머무는 것, 그것이야말로 품격이자 다도의 본질 아닐까.



오늘도 책을 펼쳐놓고 보이차 한 잔을 마신다. 글 속의 문장과 잎 향이 어우러지고 한층 더 차분하게 만든다. 보이차는 나의 기분에 꼭 맞는 맛이다. 오랜 친구처럼, 내가 어떤 마음으로 앉아 있는지 먼저 알아주는 듯하다.



가끔 내가 아끼는 사람이 놀러 오면, 보이차를 꺼낸다. 다도에서는 차를 우려내는 시간보다 함께 마시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 물이 끓는 소리와 찻물이 스며드는 시간, 그 사이에 흐르는 대화와 침묵이 삶의 온도를 조절해 준다. 그 기다림 속에서 서로의 마음을 알아차린다. 차가 식는 동안, 말은 깊어지고 마음은 부드러워진다. 그것이 보이차가 가진 매력이다.



보이차를 마시며 기다림을 배운다. 물이 뜨거워도 서두르지 않고, 찻잎이 우러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린다. 그 시간은 명상의 시간이다. 세상의 소음이 멀어지고 내면의 파도가 잔잔해진다. 사람과의 대화에서도 기다림은 중요하다. 누군가의 말을 중간에 자르지 않고, 다 우러나기까지 기다려주는 그런 마음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대화는 쉽지 않다. 내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기보다는, 상대의 말속에 담긴 마음을 듣는 일이 더 어렵다. 하지만 보이차를 마시며 배운 고요함은 나를 조금씩 바꿔놓는다. 조급하지 않게, 말보다 눈빛으로 이해하고 설명보다 공감으로 알아듣고, 설득이 아니라 이해로 다가가려는 마음이다. 그것이 보이차가 내게 알려준 사랑의 은유다. 보이차의 향기 속에는 묘한 따뜻함이 있다. 세월의 깊은 침묵이 녹아 있고, 기다림의 온기가 스며 있다. 그것은 삶을 대하는 태도이고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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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모금의 보이차가 목을 타고 내려갈 때, 문득, 사람의 마음도 이처럼 천천히, 부드럽게 우러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차 한 잔 속의 온기처럼, 누군가의 마음속에도 잔잔한 평화가 스며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보이차를 마시며 그 향기 속에서 세월을 음미하고, 내 안의 고요와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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