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산은 덕을 쌓는 일의 철학을 닮았다
가을 산은 언제 보아도 참 곱다. 봄의 연둣빛 설렘도, 여름의 짙은 녹음도 좋지만, 가을 산의 빛깔에는 그 어떤 계절도 흉내 낼 수 없는 품격이 있다. 세월의 무늬처럼 켜켜이 물든 단풍잎은 붉음과 노랑, 갈색의 경계 사이에서 천천히 사라져 간다. 가을산은 사라짐의 미학을 안다. 소리 없이 낙엽을 내려놓으며 이제 그만 내게 놓아도 괜찮다는 위로를 건넨다. 그래서 가을산을 오르면 괜스레 마음이 따뜻해지고, 또 한편으로는 포근하게 다가온다.
북한산 산책로를 따라 남편과 함께 걸었다.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들고, 그 빛이 떨어진 자리마다 낙엽들이 금빛으로 반짝인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들이 살랑이며 인사한다. 빨간 단풍잎은 발갛게, 은행잎은 노랗게 익어간다. 저마다의 색깔로, 저마다의 이별을 준비하는 듯하다. 그렇게 만들어진 낙엽길을 천천히 걸을 때면 발끝마다 사각사각,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소리가 난다.
산과 맞닿은 오솔길로 접어드니 돌탑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온다. 크고 견고한 돌탑도 있고, 엉성하지만 정겨운 돌탑도 있다. 사람의 손끝이 닿은 시간의 흔적들. 누군가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며 올렸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소망을 담아 올렸을 것이다. 나도 발걸음을 멈추어 돌멩이 하나를 주워 그 위에 올려놓았다. 뾰족하지 않은 넓적한 돌, 무게감이 적당한 것으로 올려두고는 잠시 눈을 감았다. 별다른 기도는 아니지만, 내 마음 한 조각이 이 돌 속에 스며들기를 바랐다. 그렇게 나의 돌 하나가 탑의 한 층이 되고, 그 탑은 다시 누군가의 위로가 되어 이어질 것이다.
가을 산은 덕을 쌓는 일의 철학을 닮았다. 밥을 짓듯이, 이름을 짓듯이, 인연을 짓듯, 모두 덕을 쌓는 일은 시간이 필요하다. 돌 하나 얹는 데도 마음이 필요하듯, 사람 관계도, 삶의 의미도 그렇게 천천히 쌓여간다. 가을 북한산은 나에게 말한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쌓아가라'고.
북한산을 더 오르자 낙엽이 더 쌓였다. 내려앉은 낙엽들이 부드럽게 발밑을 감싼다. 그 위를 걸을 때면 마치 세상의 모든 소음을 잠시 잊는 듯하다. 나무들은 이미 잎을 많이 털어 낸 나무들이 보인다. 서둘러 겨울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처럼, 내려놓을 줄 알아야 다음을 맞을 수 있다는 걸, 자연은 언제나 먼저 보여준다.
문득 생각했다. 나도 올해 내 안의 낙엽들을 내려놓아야겠다. 불필요한 걱정, 오래된 미련, 돌이킬 수 없는 후회들. 그것들을 하나둘 떨구고 나면, 나 역시 새로운 봄을 맞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부부는 북한산 중턱까지 오르고는 적당한 지점에서 하산을 했다. 그날 컨디션만큼만 정해놓은 지점이 있다.
산 아래로 내려오는 길, 하늘이 유난히도 맑다. 바람도 알맞게 살랑 불어온다. 돌탑에 올린 그 돌 하나 때문일까, 아니면 가을 산이 건넨 다정한 인사 때문일까. 모든 것이 사라져 가는 계절이지만, 산에 오르다 보면 괜히 풍족한 마음을 가진다. 이토록 마음이 풍성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산에서만 느끼는 신비다.
~~~~~~~~-----------~~~~~~ㅇㅁ
가을 산이 참 곱다. 가을이 찬란하게 예쁘다.
그 찬란함 속에는 끝이 있고, 그 끝 속에는 또 다른 시작이 있다. 매년 가을을 떠나보내며, 또 조금씩 삶을 완성해 간다. 돌 하나를 올리듯, 마음 하나를 얹으며. 천천히, 그러나 단단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