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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이 익어가는 고을 '영동'

가을은 언제나 붉은빛으로 완성된다.

by 현월안




가을은 언제나 붉은빛으로 완성된다. 들녘엔 황금이 물결치고, 산자락에는 단풍이 붉게 번지며, 마을 어귀마다 감이 주홍빛으로 익어간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가지 끝의 감들이 살랑이며 햇살을 머금은 빛을 반사한다. 영동의 가을은 바로 그 붉은 감빛으로 가득하다. 감나무 아래 서면, 고향의 그리움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감은 예로부터 효시(孝枾)라 불렸던 이름처럼, 감에는 부모를 향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몸이 약한 어른들께 드리면 기운을 북돋아 준다고 해서, 옛사람들은 집 앞마당에 감나무 한 그루씩을 심었다. 그 나무 아래엔 어머니가 계셨고, 그늘 아래엔 아이들의 웃음이 있었다. 시간이 흘러 감은 세월을 기억하는 나무가 되고, 마을의 추억이 되었다.



조선의 시인 박인로는 홍시 한 알을 보고도 눈시울을 붉혔다. 붉게 익은 감을 손에 쥐었을 때, 그가 느낀 것은 단 맛이 아니라 품어도 드릴 이 없는 슬픔이었다. 부모님께 드릴 수 없을 때, 세상은 차갑게 느껴진다. 홍시의 달콤함이 그리움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영동은 감의 고장이고 골짜기마다 감나무가 많다. 감의 고장이라 불리는 이유가 괜히 붙은 것이 아니다. 집집마다 감나무를 심던 그 마음이 세대를 넘어 전해진 것이다. 한천팔경을 지나 심천강을 따라 달리다 보면, 도로 양편에 주홍빛 감나무들이 가로수로 이어져있다. 또, 영동역에서부터 영동 시내에 이르는 도로에는 감나무가 가로수라서 감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해 질 무렵 붉게 물든 하늘 아래에서 감들이 불빛처럼 반짝이는 풍경은,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이다.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으면, 그 안에는 살아온 세월과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 함께 담긴다.



감나무는 오래전부터 집집마다 한 그루씩 집에 있었고 삶의 일부분이었다. 조선 시대 왕들이 외국에 보낼 선물로 건시를 택한 것은 단순히 맛 때문이 아니었을 것이다. 정성으로 말린 감 한 알 속에는 계절의 인내와 자연의 은혜가 담겨 있다. 세종 때 대마도에, 인조 때는 금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은, 감이 단순한 과일을 넘어 마음의 예물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도 혼례나 제사, 명절의 선물로 건시를 주고받고 그 마음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올해는 영동 감의 생산량이 늘어나 풍년이라고 한다. 폭염과 가뭄에도 별다른 피해를 받지 않았고, 여름 햇살이 그대로 스며들어 풍년이라는 소식이다. 자연의 빛 속에서 감나무는 여전히 붉은 열매를 맺는다. 그 끈질긴 생명력은 어쩌면 우리 선조들의 마음을 닮았다. 힘들어도, 그리워도, 한결같이 누군가를 향한 사랑으로 익어가는 것. 그것이 감의 빛깔이고, 어쩌면 인간의 삶 또한 그러하지 않을까.



감은 기다림의 과일이다. 초록빛일 때는 떫고, 시간이 흘러야만 단맛이 우러난다. 사람의 인생도 그렇다. 젊어서는 세상의 떫음을 배우고, 세월이 쌓여야 비로소 단맛을 낼 수 있다. 가을 햇살 아래에서 익어가는 감나무를 보며 삶의 철학을 배운다.



가을, 누군가에게 줄 선물을 고민한다면 영동의 곶감을 선물해 보자. 과일 한 상자에 정성과 효심이 함께 담긴 마음의 표현이다. 부모님께 드린다면 효를 실천하는 것이고, 또 땀 흘린 농민들을 돕는 따뜻한 나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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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이 주렁주렁 달린 영동의 가을. 붉은 감빛이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 속에서 알게 된다. 진정한 사랑이란 말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으로 익어가는 것임을. 그리고 그 사랑이 어느새 홍시처럼 또 잘 말린 건시처럼, 부드럽게 마음속에 물들어 있음을 안다. 가을의 영동은 감 한 알에도 사랑이 듬뿍 담긴 아름다운 고장이다. 감이 익어가는 고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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