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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지나간다

가을이 깊어진다

by 현월안




아침 문을 열면 코끝에 닿는 냄새가 달라졌다. 여름에는 눅눅한 습기가 먼저 밀려왔지만, 이제는 차가운 바람이 앞선다. 그 바람 속에는 낙엽의 향기, 새벽이슬의 냉기, 그리고 어제의 햇살이 묘하게 뒤섞여 있다. 냄새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기억의 깊은 곳을 건드린다. 오랜만에 맡은 공기 속에서 잊고 있던 계절의 얼굴을 만난다.



길가의 벚나무는 벌써 반쯤 비어 있다. 여름 내내 그늘을 드리우던 잎들이 가장 먼저 바람을 맞았다. 그 뒤를 따라 느티나무 잎이 노랗게 물들고, 은행나무는 가지 끝부터 노란 물결을 번지게 한다. 감나무는 햇살이 닿을 때마다 붉은빛을 품고, 바람이 스칠 때마다 조용히 잎을 떨어뜨린다. 같은 바람을 맞는데도, 나무마다 낙엽이 지는 순서는 다르다. 햇빛의 방향, 뿌리의 깊이, 가지의 힘이 다르기 때문이다.



먼저 떨어진 잎은 땅을 덮어 뒤따르는 낙엽을 받쳐 준다. 그것이 흙이 되고, 다음 해의 새싹을 키운다. 세상에 헛된 이별은 없다. 떨어진 잎은 다음 생을 위한 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사람의 삶도 그러하다. 누군가는 먼저 자리를 내어주고, 누군가는 아직 제 빛을 발한다. 먼저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남은 이들의 길을 비춘다. 세대와 인연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가 있다. 마치 낙엽의 순서처럼 조용하고 자연스럽다. 억지로 바꾸려 하지 않아도, 제때에 물들고 제때에 떨어지는 것이 삶의 이치다.



가을 언저리는 부드럽고 순하다. 모든 것이 떨어지는 계절이고, 사실은 다음 생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나무는 잎을 버림으로써 내년의 싹을 얻는다. 사람 역시 불필요한 욕심과 미련을 내려놓을 때, 마음속의 공간이 새로워진다. 낙엽은 떨어짐의 미학이고, 순환의 언어다.



벤치에 앉아 가을바람에 날리는 낙엽을 본다. 각각의 잎이 서로 부딪히며 땅으로 내려앉는 모습이 마치 인생의 장면 같다. 누군가는 먼저 떨어져 길을 만들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 위로 살며시 내려앉는다. 누군가의 끝이 또 누군가의 시작임을 알게 된다.



가을은 순하고 따뜻하다. 떠나보내는 아쉬움과 새로운 시작의 설렘이 함께 담겨 있어서다. 바람 한 줄기에도 누군가의 기억이 실려 있고, 그 기억이 이 계절을 깊게 만든다. 아침에 문을 창문을 열며 또 한 번 낙엽의 순서에서 삶을 배운다. 모든 것은 제때에 물들고, 제때에 떨어진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이 모여, 다시 다음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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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모두에게 순서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주는 계절이다. 서두르지 말고 또 비교하지 말고, 각자의 시간에 물들어가라고. 낙엽이 바람에 몸을 맡기듯, 삶의 바람 속에 나를 맡긴다. 가을은 더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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