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이 탐스럽게 익어가는 고향 마을
가을은 언제나 조용히 찾아온다. 어떤 요란한 소리도 없이, 그저 들녘의 바람결과 감나무의 붉은 열매 속에 담겨 천천히 익어간다. 이번 긴 연휴에 친정 사 남매가 고향에 다 모였다. 풍성하게 익어가는 넉넉한 가을 고향을 찾았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것은 온통 감나무였다.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붉은 감들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그 풍경은 마치 오랜 시간 동안 침묵 속에서 삶을 단단히 익혀온 고요한 미소 같았다.
감나무는 아름다운 나무다. 봄에는 눈에 띄지 않는 연둣빛 잎을 피워내고, 여름엔 한낮의 뜨거운 햇볕을 온몸으로 견딘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 자신이 품어온 모든 시간과 햇살과 바람을 맞으며 하나의 열매로 응축해 낸다. 아무 말 없이 아무 치장 없이, 그저 자연의 순리에 따라 결실을 드러낸다. 바람이 쌀쌀해지고 잎을 서둘러 덜어내는 순간에도 감나무는 숨지 않는다. 잎을 내려놓음으로써 자신의 열매를 세상에 온전히 내보인다.
감나무는 흔히 사람 곁에서 자라는 친근한 나무다. 그 흔함 속에 숭고함이 숨어 있다. 사람들은 흔하다는 이유로 그 가치를 종종 놓치지만, 진정한 아름다움은 늘 일상의 평범함 속에 숨어 있다. 낙엽이 진 들판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붉은 감은, 삶을 살아가며 잊고 지내던 소박한 풍요를 일깨운다. 오래도록 지켜온 것을 감사히 바라볼 줄 아는 마음의 풍요. 감나무는 그걸 말없이 알려준다.
감나무는 가지를 털어내고 남겨둔 까치밥 하나에도 따뜻한 철학이 담겨 있다. 누군가의 허기를 위해 남겨둔 작은 배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단순하고도 깊은 지혜다. 인간은 흔히 세상을 이기는 법을 배우려 하지만, 감나무는 세상과 더불어 사는 법을 보여준다. 감 하나를 따기 위해 손을 뻗다 보면, 가지 끝의 흔들림 속에 삶의 겸손이 배어 있음을 느낀다. 손에 닿지 않는 열매는 남겨두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내가 다 가질 수 없다는, 그리고 그 남김이 누군가의 삶을 이어주는 연결이 된다는 깨달음.
감나무의 쓰임새는 그 철학을 닮았다. 단단한 줄기는 오래된 가구로 다시 태어나고, 잘 말린 목재는 검은빛을 띠며 세월의 품격을 더한다. 감나무는 생애의 끝마저도 유용하게 쓰인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마지막까지도 누군가를 위해 남기며 살아야 함을 알려주는 듯하다. 감나무는 꽃에서 열매까지, 잎에서 줄기까지 버릴 것이 하나 없다. 그전 생애가 하나의 순환이고, 그 순환 속에서 진정한 연결이 이루어진다.
그날, 고향 마을 언덕 위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감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이 살짝 옷깃을 스치고 지나갔다. 가지마다 매달린 감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햇살을 반사했다. 그 순간 문득, 삶도 감나무처럼 익어가는 것이 아닐까. 햇살과 비, 때로는 바람과 추위를 견뎌내야 비로소 단맛이 깃든다. 아직 덜 익은 감은 떫고, 너무 서두르면 그 맛을 볼 수 없다. 인생의 깊은 맛은 기다림 속에서, 그리고 견딤 속에서 천천히 완성되는 것이다.
감나무 아래서 비움의 미학, 남김의 지혜, 그리고 익어감의 철학을.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사람들은 앞다투어 무언가를 얻으려 하지만, 감나무는 말없이 제자리를 지킨다. 때가 오면 꽃을 피우고, 때가 지나면 잎을 떨구며, 마침내 열매를 내어준다. 그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겸손함은 인간이 잃어버린 삶의 품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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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날 고향의 감나무는 시간의 결실이고, 삶의 성숙이다. 가지 끝에 매달린 붉은 감 하나가 바람에 살짝 흔들릴 때, 마음이 비워진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평화와 감사가 그 붉은빛 속에 스며있다. 감나무는 조용히 일러준다. 삶은 익어가는 것이라고. 조급해하지 말고, 비우고 기다리면 시간도 달처럼 감처럼, 붉게 익어갈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