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시댁 당숙 '병문안'

누군가는 다치고 고쳐지고 삶은 다시 돌아가고

by 현월안



시댁 7촌 재당숙 병문안을 갔다. 요즘 세상에서 당숙이라는 말은 다소 멀게 들린다. 남편과 어릴 때 같은 동네에서 자라 비슷한 또래로 지내던 사람이다. 서로 소식은 뜸하게 알고 지내지만 남편의 마음속 거리만큼은 그리 멀지 않은 관계. 남편의 당숙이 회사에서 일하다가 다쳤다는 소식을 건너 건너 들었다. 마침 입원했다는 병원 근처에 갈 일이 생겨서 우리 부부는 함께 병문안을 갔다. 손을 다쳤다기에 가벼운 상처쯤으로 생각했는데, 막상 병원에 가보았더니 사정은 달랐다. 인쇄 기계에 손가락이 빨려 들어가 눌리며, 네 번째 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의 한 마디씩이 절단된 사고였다.



그는 인쇄 기술자다. 26년 동안 인쇄소를 운영하며 묵묵히 일을 해온 사람이다. 오랜 세월 기계와 함께 살아온 손이었을 것이다. 그 손이, 이제는 제 역할을 잃은 채 붕대로 감겨 있었다. 우리 부부는 그 손을 바라보며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무엇보다 그의 얼굴에 어려 있던 근심과 자책이 더 깊게 다가왔다. "내가 부주의했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서..." 그는 자꾸만 자신을 탓했다. 우리 부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그의 말을 듣고, 조용히 손을 잡았다.



병실은 네 명이 함께 쓰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방의 모든 남자들은 산업 현장에서 다친 이들이었다. 다리를 심하게 다친 사람, 팔을 심하게 다친 사람, 손가락을 다친 사람, 모두가 중증 외상 환자들이었다. 모두가 자신만의 사고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에게 묻지 않았다. 말없이 창밖을 보거나, 긴 정적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는 묘한 공감과 체념이 깃들어 있었다. 그곳에서는 말보다 무언의 위로를 해야 했다.



당숙의 사고는 그 병실에서 그나마 작은 사고였다. 그러나 당숙의 손가락 한 마디 사고는 삶의 무게를 바꿔 놓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 손가락에는 26년의 노동과 기술, 그가 쌓아 올린 인생의 신뢰가 함께 잘려나간 것이다.



흔히 세상은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를 귀하게 여긴다. 세상의 수많은 이름 없는 노동자로 살아가며, 위험과 불안을 견디고 있다. 그들의 땀으로 세상이 움직이지만, 그들의 삶은 늘 보호받지 못한다. 다치면 개인의 부주의라 하고, 아프면 운이 없었다고 여긴다. 그것은 한 개인의 불운이 아니고, 어쩌면 사회가 외면한 구조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뉴스에서 듣던 산업재해가 더 이상 남의 일로 들리지 않았다. 사고는 언제나 멀리서 일어나는 듯하지만, 실은 모두의 일상 가장 가까이에 있다. 우리가 쓰는 종이 한 장, 마시는 커피 한 잔에도 누군가의 손길과 위험이 스며 있다.



병문안은 언제나 어렵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 어떤 표정으로 눈을 마주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병문안에서 필요한 것은,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듣는 일뿐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옆에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따뜻한 위로일지도 모른다. 병원을 나서는 길에 창문 너머로 가을 햇살이 흘러내렸다. 그 빛은 마치 상처 위로 천천히 스며드는 온기 같았다.


*~*~~*~~*~~*~~*/


삶은 언제나 다치고 고쳐지고 다시 움직인다. 그 과정 속에서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단순하다. 누군가의 아픔 앞에서 조용히 멈추는 일, 그리고 그 마음의 온도를 잊지 않는 일이다.

세상은 묵묵히 일하는 손들 위에 세워져 있다.

오늘을 기억하며 묵묵히 듣는 일의 온도를 마음속에 담아 둔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