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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어가는 가을과 차 한잔 할래요?

가을 속에서 차 한잔의 여유

by 현월안




가을이 깊어가는 길목에서, 다도를 가르치는 지인이 건넨 '차 한잔 할래요?'라는 다정한 말은 소소한 설렘이다. 늘 바쁘게 돌아가는 삶 속에서, 그 제안은 잠시 멈추어 서서 심호흡을 하라는 다정한 권유다. 장소는 미술관 옆 찻집. 예술적인 공간과 이어진 곳에 조용히 마련된 다회 장소는,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격리된 곳이어서 더 포근하게 다가온다.



차향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은은한 온기 속에서 같이 간 사람들은 이내 친근한 동행이 되었다. 요즘의 만남이 원두의 산지와 로스팅 온도까지 정밀하게 계산된 커피 한 잔으로 시작되고 끝나는 일상이라서 차를 위한 '기다림'의 미학은 잊고 지낸 지 오래다. 삶이 너무나 빠르게 추출되고 소비되는 과정에 익숙해져 버린 것은 아닐까.



하지만 오늘, 느리게 움직이는 차 선생님의 손길은 마치 멈춰버린 시간을 다시 감는 듯했다. 찻잔을 예열하고, 마른 찻잎을 다관에 담아 물을 부어주는 그 정성스러운 움직임 하나하나가 명상처럼 고요하다. 찻잎이 물을 만나 이파리로 피어나는 그 장엄한 과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순간, 문득 깨달았다. 누군가를 이토록 고요하게, 온전히 바라보고 기다려본 적이 언제였던가. 그 차 한 잔은 기다림과 존중을 가르쳐주는 사랑스러운 여유다.



내 앞에 놓인 보이차 한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더니, 그 따스함이 손바닥을 넘어 온몸의 세포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작은 찻잎이 세상에 태어나 햇빛과 바람, 비를 머금고, 키우는 이의 정성과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자라났을 것이다. 그리고 깊은 맛을 품기 위해 덖어지고 말려지고 뒤틀려지는 고통의 시간을 묵묵히 견뎌냈으리라. 그 수많은 시간의 무게, 찻잎의 서사가 붉게 배어들어 내 입안을 감도는 순간, 마음은 절로 경건해지고 고요해진다.



오랫동안 보이차를 깊이 음미하고 느꼈던 것은, 어쩌면 내가 그 시간의 깊이를 읽어낼 만큼 충분히 고요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잎 차는 천천히 오래, 그리고 고요히 음미해야 비로소 만날 수 있는 존재다. 그 느림 속에서 비로소 찻잎의 속삭임을 듣고, 인생의 깊은 깨달음과도 같은 담백함을 발견하게 된다. 오래된 다기처럼, 오랜 시간을 품은 것은 가볍고 단정하며 그윽한 향을 풍긴다.



보이차를 마신 후에는 찻잎을 통째로 갈아 만든 연둣빛 말차가 커다란 찻사발에 풀어졌다. 대나무 차선이 빠르게 휘저어 만들어낸 쌉쌀하면서도 담백한 풀 향은, 시간의 무게를 통과한 뒤의 청량함과 같았다. 이날 융숭한 대접은 모든 찻잔이 차 선생님이 모으고 아끼시던 귀한 다완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의 만남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소중한 대접이었는지를 다시 한번 알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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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마시고 나오면서 미술관 야외에 전시된, 오랜 시간을 품은 조각상이 눈에 띄었다. 천천히 여유 있게 야외 설치 미술을 보며 오늘 우리가 마신 차의 시간과 닮아 있었다. 오늘 그렇게 고왔던 하루의 순간들은 언젠가 세월 속에 희미해지겠지만, 오랜 시간을 품은 찻잎이 내게 전해준 그 따뜻하고 고요한 느낌, 그리고 사랑스러운 벗의 초대에 대한 감사함만은 내 마음 깊숙한 곳에 머물렀다. 깊어가는 가을 속에서 좋은 사람들과 차 한 잔의 여유와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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