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낮은 평가에도 개의치 않고 오직 자신의 열매를
비와 햇살이 번갈아 하늘을 차지하는 동안, 호박은 묵묵히 익어간다. 세상사에도 비와 햇살이 있다. 때로는 슬픔과 고단함이 밀려오고, 또 어떤 날은 따스한 웃음이 내리쬔다. 호박은 그 모든 날씨를 받아들이며 한 줄기 덩굴 위에서 자신의 시간을 익힌다. 흙냄새와 비바람조차도 당차게 이겨낸다. 세상의 낮은 평가에도 개의치 않고, 오직 있는 그대로, 조용히 자신의 열매를 키워낸다.
호박은 흔히 못생겼다, 하찮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그저 덩굴을 뻗고 넉넉한 품으로 세상을 품는다. 아무리 하찮게 여겨도, 호박만큼 사람에게 유익한 열매도 드물다. 어릴 때는 풋호박으로, 늙으면 단호박으로,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늙은 호박이 산후조리에 쓰이듯, 세월을 견딘 늙음은 또 생명을 회복시키는 힘을 가진다. 호박은 나이 든 것이 퇴색이 아닌 완성이라고.
고향집 담장을 타고 흐르던 호박 덩굴은 어린 시절의 기억과 맞닿아 있다. 긴 연휴 기간에 형제들이 모두 고향에 모였다. 사 남매의 웃음소리가 마당을 가득 채웠다. 고향의 공기 속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편안함이 스며 있다. 낯선 도시의 시간 속에선 찾기 힘든, 따뜻한 온기다. 고향마을 집집마다 담장을 넘고 마을 언덕을 덮은 호박줄기들. 크고 작은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어떤 것은 노랗게 익었고, 또 다른 것은 아직 푸르게 매달렸다.
엄마가 살아계실 때, 호박은 밥상에서 빠지는 날이 없었다. 여름이면 풋호박을 채 썰어 된장찌개에 넣고, 가을이면 늙은 호박으로 죽을 쑤셨다. 밀가루 반죽에 콩가루를 듬뿍 섞어 국수를 만들어주시던 날, 그 국수 위에 채 썬 호박을 넣어 끓이던 냄새는 지금도 생생하다. 국물이 살짝 노랗게 물들면, '꿀맛이야' 하며 우리 가족들은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맛있는 웃음 속엔 부모 자식의 사랑과, 삶의 지혜가 함께 담겨 있었다.
이번에 형제들이 다시 모여, 엄마의 그 호박 칼국수를 함께 만들어 먹었다. 젓가락 끝에서 퍼지는 따뜻한 맛이 가슴을 적셨다. 그 순간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입안 가득 퍼지는 추억의 맛에 잠시 말을 잃었을 뿐이다. 어쩌면 그건 호박의 맛이 아니라 엄마의 마음이 남긴 맛이었을 것이다.
호박은 욕심이 없다. 햇볕을 독차지하려 들지 않고, 담을 넘어서도 이웃집 지붕에 살포시 기대어 매달린다. 땅이 척박해도, 주인이 돌보지 않아도 스스로 익어간다. 그 겸손과 자립은 오래된 철학 같다. 세상은 점점 화려함을 좇고, 사람들은 각자의 그늘을 숨기려 하지만, 호박은 꾸밈이 없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속은 달고 따뜻하다. 그래서 호박을 보면 사람의 본모습을 떠올린다. 겉은 세월에 닳아도, 속은 여전히 단맛을 품고 있는 존재.
---~-~-~-~-~-~-~***
어쩌면 호박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땅을 딛고 햇살을 받는 그 자체가 이미 충분한 결실이다. 가을바람이 분다. 늙은 호박이 주황빛으로 무르익어간다. 그리고 엄마의 손맛도, 고향의 냄새도, 형제의 웃음도 모두 호박처럼 익어가고 있었다. 그래 맞아, 인생이란 비와 햇살을 번갈아 맞으며 조금씩 단맛을 배워가는 과정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