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고, 돌보고, 섬세함에서 문학이 꽃핀다
가을 햇살이 길게 드리운 오후, 한 장의 책장을 넘기듯 세상은 천천히 변해가고 있다. 문학의 역사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오래도록 남성 중심의 세상으로 여겨졌던 문단은 이제 여성의 목소리로 더욱 섬세하고 강렬하게 물들어 가고 있다. 그 중심에는 삶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고, 아픔을 감싸며, 희망을 노래하는 여류 작가들이 많다.
펄 벅이 있었다. 그녀는 여성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인간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1931년 '대지'를 통해 중국 농민의 삶을 그려내고, 가난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인간의 존엄을 노래했다. 그녀의 시선은 늘 낮은 곳에 머물렀고, 거기에서 생명의 고귀함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녀는 인간과 동물의 경계 너머, 존재 그 자체를 사랑하고 인간애와 동물애의 경계를 허문, 그야말로 사랑의 철학을 만들어 냈다.
펄 벅이 한국의 농부를 보고 감탄하며 말했던 겸허한 생명 사랑의 정신은, 어쩌면 지금의 우리에게도 가장 필요한 가치일 것이다. 산업화 이후로 삶을 빠르게 바꾸어 놓았지만, 그 속에서도 여전히 인간의 마음을 살피고, 생명의 숨결을 기록하는 일이 대부분 문학의 몫이다.
그리고,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 이름은 마치 강물처럼,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을 준다. '채식주의자'에서, '소년이 온다'에서 인간 내면의 연약함, 폭력 속에서 피어난 생명의 떨림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세상이 주목한 것은 그 서정의 힘이었다.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고, 고통조차도 아름다움으로 승화되는 언어의 기적이고, 한강의 기적은 경제의 기적에서 문학의 기적으로 이어졌다.
이제 한국 문학은 인류의 이야기를 하는 단계로 올라섰다. 펄 벅이 동양의 대지에서 인간의 본질을 보았듯, 한강은 한국의 상처에서 인간의 보편적 진실을 길어 올렸다. 두 여류 작가의 영혼은 시공을 넘어 마주 서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흐르는 것은 생명에 대한 경외, 인간에 대한 연민, 그리고 세상에 대한 끝없는 사랑이다.
문학은 더 이상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시대의 고통을 껴안으며, 용서와 화해의 길을 비춰주는 등불이 되기를. 6·25 전쟁, 5·18 광주민주화운동, 제주 4·3의 상처를 지나온 세대가 있다면, 그 아픔을 문학으로 이어받아 기억의 의미를 다시 새기는 젊은 세대가 있을 것이다. 문학은 세대를 잇는 다리가 되고,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잉태하는 생명의 언어가 된다.
요즘, 문단에 여성이 강하다. 그 강함은 그것은 품는 힘, 돌보는 힘, 이해하는 힘이다. 여성이 쓴 문학에는 눈물의 온도가 있고, 침묵의 리듬이 있다. 여자의 감성이 빛을 바라고, 생명을 품어본 존재만이 알 수 있는 생의 진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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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여류 작가가 쓴 문장은, 한 세대의 영혼을 위로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위로는 국경을 넘어선다. 펄 벅이 그러했고, 한강이 그러하다. 이 두 사람은 문학으로 상처를 사랑으로 덧입힌다. 또 다른 여성이, 또 다른 언어로 이 땅의 아픔과 희망을 노래할 것이다. 문학은 그렇게 다시 피어나고, 생명은 그 안에서 다시 숨을 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