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여인이여 건강 회복하시라
고요와 성찰의 계절 가을이다. 나는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지인의 1박 초대를 받아, 함께 알고 지내는 또 한 사람과 나와 둘이서 초대받은 양평으로 향했다. 평생을 도시의 첨단 기술 속에서 고독하게 그러나 치열하게 살아낸 그녀가, 마침내 이른 퇴직을 하고 자신만의 우주를 찾아 들어간 곳. 그곳은 문명의 소음이 닿지 않는, 땅의 가장 깊은 품이었다. 지인의 집은 보기에는 소박 해 보였지만, 그가 평생 쌓아 올린 건축물처럼 내부는 단단하고 정갈했다.
얕은 산자락이 도로를 걸치고 있고 문을 열면 펼쳐지는 광활한 푸른 하늘과 그 아래로 펼쳐진 산자락의 파노라마가 장관이었다. 그것은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선 풍경이고, 그저 잠시 인간의 시야를 빌려 머물러 있는 듯한 장엄함이었다. 나는 그 앞에서 '이런 축복이 또 어디 있을까' 하고 감탄을 했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그 풍경의 가치는 소유의 크기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온전히 바라볼 줄 아는 눈과 비울 줄 아는 마음의 깊이에서 온다는 것을. 집주인 그녀는 가장 귀한 것을 무소유의 방식으로 얻어낸 지혜를 이미 실천하고 있었다. 그의 집은 풍경을 가두는 액자가 아니라, 우주를 받아들이는 통로 그 자체였다.
그녀의 시골 생활에는 경계 없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 작고 귀여운 강아지 여러 마리가 있었다. 그 존재만으로도 정적 속에 율동감을 불어넣는 작은 친구들은, 온종일 쉴 새 없이 뒹굴고 뛰놀며 집 안과 밖의 경계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강아지들은 순수한 평온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우린 마치 오랜 수양 끝에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처럼, 손님 둘은 그만 자연 풍경에 혼을 빼앗겼다. 거대한 자연의 웅장함과 대비되는 작고 미약한 여러 마리의 강아지들의 평화로움과 자연의 풍경을 동시에 거머쥔 채, 그 외의 모든 것을 덜어내고 있었다.
실제로, 그녀의 거처는 너무나 텅 비어 있어 거의 여백에 가까웠다. 건축 설계를 하는 남편과 글 쓰는 아내라서 그런지 주인 부부와 잘 어울리는 딱 맞춤집이었다. 그녀의 아들 둘은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고, 딱 두 식구가 누리는 천국이었다. 그녀는 책을 읽느라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을 게을리하여 건강을 잃고 암 초기 판정을 받았었다. 워낙 초기 발견이라서 지금은 관리하면서 건강을 지켜보는 중이라고 했다. 건강에 집중하기 위하여 이사할 때 책을 한 권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것이 놀라웠다. 한때 삶의 전부이자 그녀의 안식처였던 책이 이제는 족쇄이자 바깥세상을 차단하는 벽이 되었음을 인정한 것이다. 평생의 업이었고 글을 쓰는 사람이 건강을 잃고 나서 잠깐은 쉬어가는 시간이라고 했다. 그녀는 책을 당분간 거리를 두고, 과잉된 정보와 물질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가장 철학적인 형태의 은둔을 시작한 셈이다. 그의 집은 과거의 흔적을 지운 하얀 도화지였고, 그 위에 오직 숲의 침묵과 강아지들의 발소리만이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함께 간 지인과 나는 그녀가 쪄준 고구마를 먹으며 그녀의 화제가 늘 책이었는데 이제는 건강이야기로 바뀌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 달콤함 속에 담긴 깊은 마음과, 손님을 위한 배려와 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튿날 아침, 그녀는 해가 중천에 뜰 무렵에야 숲을 헤치고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직접 농사지은 싱싱한 상추와 채소들이 들려 있었다. 농약을 사용 안 하고 유기농으로 갈러 낸 채소들이라서 더 맛있게 먹었다,
그녀는 책과 잠시 거리를 둔 것이 아니라, 책의 본질을 새로운 형태에서 발견한 것이다. 책이 주는 즐거움이란, 예측 불가능한 지혜와 미지의 맛을 한 장씩 넘겨가며 탐험하는 행위가 아니었던가. 숲 속에서 땀 흘려 얻거나 이웃과의 교류를 통해 얻어낸 싱싱한 채소는, 그 자체로 땅이 쓴 가장 순수한 책이다. 페이지마다 새로운 맛과 향을 선사하는 자연의 서사다. 그녀는 지적인 탐닉을 자연적인 감각의 경험으로 대체하고, 삶의 방식을 통째로 재편집하고 있었다.
활자 중독으로 평생을 살아온 이의 영혼은, 결코 활자를 완전히 포기할 수 없다. 아마도 그녀는 종이책을 당분간 벗어던졌을지언정, 지식과 이야기, 그리고 깨달음을 향한 영혼의 갈증까지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 머지않아 그의 빈 벽은 전자책 단말기가 뿜어내는 은은한 빛이나, 오디오북의 감미로운 목소리로 채워질 것이다. 그는 이미 새로운 형태의 서재를 구매하고 있을 것이며, 그 사이를 여전히 사랑스러운 강아지들과 분주하게 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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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인이여, 주저하지 말라. 삶은 읽고 경험하고, 다시 읽는 행위의 무한한 반복이다. 활자의 숲이든, 진짜 숲이든, 당신의 영혼을 살찌우는 모든 공간이 당신의 서재다. 그저 읽고, 또 읽어라. 당신이 좋아하는 책, 혹은 상추 잎사귀 속의 새로운 페이지를. 삶의 가장 아름다운 페이지는 바로 지금, 숲 속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건강 회복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