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꽃들이 준비 한 마지막 무대다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이 지난여름의 짙은 열기를 조용히 밀어내는가 싶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계절은 완연한 가을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내가 좋아하는 가을, 연일 나의 글쓰기 주제는 가을 예찬을 하고 있고, 간밤의 비바람에 바닥에 떨어진 잎들을 쓸어내는 손길은 분주하다. 그 위로 쏟아지는 따사로운 가을 햇살은 모든 것을 용서하고 포용하는 듯 따스하다.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해가 질 때까지 마냥 걷고 싶은 계절, 해가 지는 거리를 걸어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 켜질 무렵 하늘을 바라보면 물밀 듯 밀려오는 그리움은 운명처럼 짙어진다. 저녁노을에 붉게 물든 하늘이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순간, 한 해 중에 가장 아름다운 달이 시월이라는 어느 시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가을은 꽃들이 준비한 마지막 무대다. 뜨거운 열기를 이겨낸 꽃들은 더 선명하고 짙은 색으로 세상을 물들이고, 화려하게 작별 인사를 건넨다. 초록에서 붉게 물들어가는 둥근 댑싸리, 하얀 소금을 뿌려놓은 듯한 메밀꽃, 부드러운 솜뭉치 같은 가을 수국이 활짝 피어 가을을 설레게 한다. 주변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코스모스와 순수 가득한 구절초까지, 다채로운 꽃들이 그려낸 풍경화는 지금, 세상 곳곳에 장관을 이룬다. 끝없이 펼쳐진 분홍빛 보랏빛 물결을 마주하면, 꽃송이 하나하나가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본래의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모습에 감탄한다. 변치 않는 사랑이라는 꽃말을 간직한 천일홍은 햇살을 듬뿍 받아 더욱 진한 화려함을 발한다. 풀꽃이라 여기며 스쳐 지나쳤던 작은 생명들이 공원을 가득 채운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와 잔잔하고 편안한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은은한 꽃향기로 가슴에 오래도록 남는다.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사랑하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기다림이라는 단어와 가장 잘 어울리는 한적한 시골 기차역처럼, 세상은 아직 기다림의 기회를 선물해 주는 고마운 존재다. 연약한 인간이기에 약속한 대로 살아가기는 쉽지 않은 세상이지만, 그래서 사랑과 인생은 더욱 아름답고 값지다. 노랫말처럼 '사랑은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지워야 할 꿈'이라 노래하지만, 첫눈이 내리는 날 기차역에서 만날 약속을 설렘으로 기다리는 순수한 상상을 멈추지 않는다. 길고 넓게 펼쳐진 파란 하늘에서 느껴지는 포근한 '가을의 기운'처럼, 오지 않을지 모르는 사랑과 꿈을 설렘으로 기다리는 것이 우리네 삶이 아닐까.
나이가 들어갈수록 일상에서 사소한 것들을 잊어버리거나 물건을 두고 나오는 일이 잦아져, 기억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림자처럼 엄습하는 변화를 느끼지만, 이는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깨닫게 한다. 방향은 알 수 없어도 계속 걷는 동안 길은 생겨난다는 속담처럼, 인생의 길을 걷는 동안 중요한 원칙은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품위와 내면은 행복을 유지하는 일이다. 그 품위를 유지하는 데는 독서만큼 좋은 것이 없다. 깊어가는 가을에, '가을이 주는 운치'와 낙엽 한 잎을 책갈피에 끼워 넣고 책 읽기 좋은 계절 가을이다.
가을 한가운데로 접어든 시월은 집 안에 머무르기엔 너무나 아까운 계절이다. 창 너머 모든 나무가 노랗고 빨갛게 잎새를 물들이고, 황금빛 벌판이 조금씩 비어 가는 이 시기는 나들이를 하기에 가장 좋은 때다. 맑고 투명한 하늘과 아름다운 단풍을 만나러 먼 곳의 유명산이 아니더라도 동네 인근 산에만 올라도 행복하다.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산행을 하며 맑고 투명한 하늘과 멋진 가을 풍경을 만난다.
가을 축제들이 되살아난 것도 가을의 풍요로움을 더해준다. 따뜻한 가을볕 아래 노래와 춤으로 즐거움을 나누고, 또 먹거리로 나누는 축제는 가을에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선물이다. 우리 동네에도 이번 주 거리 축제를 한다. 그리고 또 미술 전시회장을 찾아 작가들의 땀과 시간이 깃든 작품을 관람하고 그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도, 이 풍성한 계절이 선사하는 가을의 사색이다.
~~~~~~~~~*--------------
벌써 옆집에서 커다란 주황색 호박을 선물 받았다. 시댁이 있는 시골에서 가져왔다고 현관 앞에 가져다 놓았다. 아무리 지치고 힘들지라도 세상은 아직 고마우며, 산다는 것은 결국 소박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가을꽃처럼 작지만 행복을 설렘으로 기다리는 일이다. 소박한 가을꽃과 어우러져 가슴이 더욱 따뜻해지고 풍성해지는 시월, 이 아름다운 계절 가을 속에서 풍성함과 행복을 충분히 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