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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서 온 가을 이야기

가을 끝자락에 만나는 반가운 포도 향기

by 현월안




가을 햇살이 한층 부드러워질 무렵, 고향에서 택배 하나가 도착했다. 포도 상자였다. 포장지를 벗기니 햇살에 반짝이는 자줏빛 포도송이가 탐스럽게 담겨 있었다. 한 알을 집어 입안에 넣자, 껍질이 살짝 터지며 달고 은근한 향이 퍼졌다. 꿀처럼 끈적한 단맛 속에는 왠지 모르게 그리운 향기가 배어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동생의 손끝에서 전해진, 오랜 시간의 정성일 것이다.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은 과일이 풍성한 고장이다. 봄이면 매화와 복숭아꽃이 흐드러지고, 여름에는 자두와 복숭아 향기를 뿜는다. 가을이면 포도와 배, 감이 익어가고 들판 전체가 달콤한 숨결로 물든다. 고향에는 지금도 남동생이 살고 있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친정집은 늘 북적였다. 종갓집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부모님 두 분의 넉넉한 인심 덕분이었다. 문턱을 넘는 이들에게 밥 한 끼, 과일 한 접시를 내어놓던 그 손길 속에는 언제나 따뜻한 온기가 있었다.



이제 부모님은 세상을 떠나셨지만, 남동생은 그 집을 지키며 부모님의 숨결을 이어가고 있다. 동생은 사업을 하지만 형제들과 나누어 먹을 만큼만 텃밭을 일구고, 포도나무, 감나무, 사과나무가 심어져 있고 온갖 채소들을 가꾸고, 해마다 정성스레 보내준다. 동생은 자주 말한다. '누나들과 나누어 먹으려고 심은 거야. 시장에 내다 팔 것도 아니야' 그 말속에는 계산 없는 마음이 담겨 있다. 동생은 엄마의 정을 많이 닮았다. 수확의 기쁨을 나누는 그 순박한 마음, 사랑을 손으로 길러내는 그 방식이 꼭 그렇다.



지난 추석 긴 연휴기간에, 사 남매가 고향집에 모였다. 식탁 위에는 동생이 직접 딴 포도와 복숭아, 배, 온갖 과일과 채소들이 풍성하게 놓여 있었다. 우리 사 남매는 천국의 웃음이 번지고, 옛이야기가 이어졌다. 세월은 그렇게 흐르고 부모님은 떠나셨지만, 그 자리에는 여전히 사랑이 있었다. 포도 한 알을 입에 넣을 때마다 그 옛날이 되살아났다. 그 옛날 마당에서 엄마가 손으로 쓰윽 닦아서 건네시던 포도 한 송이, 손등으로 닦아 주시며 연신 입안에 넣어 주시던 그 따뜻한 손길. 그 모든 기억이 과일 향과 함께 다시 피어났다.



며칠 뒤, 동생이 또다시 포도 두 상자를 보내왔다. 가을 끝자락에 먹는 늦은 포도였다. 당도는 꿀처럼 높고, 과육은 탄탄했다. 나는 그 포도를 신문지에 싸서 냉장고에 넣었다. 천천히, 오래 두고 먹기 위해서다. 양이 너무 많아서 또 포도 주스를 만들어 두었다. 유리컵에 담긴 포도주스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 붉은빛 속에 햇살과 흙, 그리고 동생의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듯하다.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삶의 깊은 자리에서 올라오는 따스한 감정이 목을 타고 흐른다.



생각해 보면 포도만큼 인간의 역사와 가까운 과일도 없다. 구약의 시대부터 사람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했고, 포도주로 변해 축복의 잔을 채워왔다. 예수는 '나는 참 포도나무요, 너희는 그 가지라'라고 했다. 땅속 깊이 뿌리내린 포도나무는 하늘로 향하며, 가지마다 열매를 맺는다. 그 모습은 마치 인간의 삶과 닮아 있다. 뿌리를 잃지 않으려는 기억, 위로 향하려는 의지, 그리고 열매를 통해 나누는 사랑. 포도는 인간 삶의 은유다.



동생이 가꾼 포도나무도 그러하다. 그것은 부모님이 남긴 유산 뿌리 위에 자라난 것이다. 아버지가 일구신 땅, 엄마가 돌보신 채소밭, 그 모든 시간의 연장선에서 동생은 그 사랑을 이어가고 있다. 가지를 치고, 벌레를 잡고, 햇빛의 방향을 살핀다. 그 모든 수고는 단 한 가지 이유, 형제들과 나누려는 마음이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귀한 일이고 사랑하는 마음이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손을 내미는 마음이다.



우리 가족이 다 모인 자리엔 냉장고에서 포도를 꺼내어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그 순간, 우리 집에는 고향의 냄새가 퍼진다. 달콤한 포도향과 함께 아버지의 웃음소리, 엄마의 엷은 미소, 그리고 동생의 사랑스러운 손끝이 함께 느껴진다. 포도를 먹으며 생각을 한다. 가족이란 멀리 있어도 서로의 삶에 스며 있는 존재라는 것을. 한 알의 포도에 담긴 달콤함은 사랑의 깊이에서 우러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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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는 요 며칠 우리 가족의 얘기 꺼리다. 고향의 향기가 푸근하게 전해지고,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향기다. 늦가을의 햇살이 기울어간다. 나는 유리잔에 포도주스를 따른다. 붉은 가을빛이 창가를 물들이고 그 식탁에 앉아 가을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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