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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네시 전화벨소리

삶을 살아가며 점점 알게 된다 혈육의 무게

by 현월안




새벽 네 시, 깊은 어둠이 아직 세상을 덮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잠결에 손끝으로 휴대폰을 더듬었다. 이 시간에 울리는 전화는 대체로 평온한 소식이 아니다. 전화가 화면에 뜬 이름은 형부였다.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온 다급한 목소리. "언니가 쓰러졌어."그 짧은 한마디에 시간은 멈추고, 마음속은 순식간에 하얗게 비워졌다.



차를 몰고 병원으로 향하는 길, 눈앞의 신호등조차 흐릿했다. 뇌졸중일까, 의식은 있을까, 그 이상일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렸다. 삶은 언제나 예고 없이 삶을 흔든다. 그때마다 인간의 의지란 얼마나 무력한가. 운명 앞에서 나는 그저 두 손을 모은 한 인간일 뿐이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언니는 이미 수술실 안에 있었다. 긴 기다림 끝에 의사가 말했다. 피떡이 혈관을 막았고, 다행히 빨리 오셔서 수술이 잘 끝났다고. 그 말 한마디에 다리에 힘이 풀리고,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날 밤 나는 알게 되었다. 혈육이라는 것은 피를 나눈 관계이고, 삶의 무게이고 또 삶의 근원 그 자체라는 사실이다.



살아가다 보면 수많은 인연이 생기고 또 사라진다. 젊을 땐 친구가 많고, 세상과의 관계가 넓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삶은 가지치기를 시작한다. 가까웠던 사람도 어느새 멀어지고, 자주 보던 이웃의 안부조차 소식이 끊긴다. 그렇게 시간이 걸러낸 관계들 속에서도 끝까지 남는 것은 혈육이다.



부모가 떠난 자리에서, 형제자매는 서로의 그림자가 된다. 혈육 중에서 누군가 쓰러지면 함께 아파야 하고, 누군가 울면 함께 젖는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피가 부여한 숙명이다. 피는 대단한 생물학적 연결이고, 마음의 가장 깊은 층에서 흐르는 유전된 사랑이다. 그 사랑은 말보다 오래 남고, 의무보다 더 깊은 관계다.



언니가 병실에서 의식을 되찾고 다시 미소를 지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이고 축복인가. 걸을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서로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적인가. 그날 새벽의 전화는 두려움의 신호였지만, 동시에 삶이 나에게 건넨 깨어남의 선물이었다.



건강은 곁에 있을 때는 그 소중함을 모른다. 그러나 한순간 균열이 생기면, 비로소 그것이 모든 것의 바탕이었음을 깨닫는다. 사랑도 그렇고 일도, 꿈도 그렇다. 모두 건강이라는 토양 위에서만 꽃핀다. 그 땅이 흔들리면 모든 것은 의미가 없다.



삶을 살아가며 점점 알게 된다. 인생의 마지막까지 곁에 남아줄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친구는 흩어지고, 동료는 사라진다. 그러나 형제자매는 끝까지 함께 걸어야 할 존재다. 젊을 땐 가까움이 당연했지만, 세월은 그것이 얼마나 귀한 특권이고 무게인지를 알려준다.



혈육은 어쩌면 삶의 마지막 안식이다. 세상에 등 돌리고, 길을 잃어도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방향. 그 방향의 문은 오래되어 삐걱대지만, 여전히 가족을 위해 열려 있다. 그 문 안에는 추억이 있고 또 용서가 있고, 그리고 사랑이 있다.



나는 요즘 언니 일로 가슴을 쓸어내리고 나서는 감사 기도를 한다. 새벽의 급한 전화가 아닌, 해질 무렵 소소한 안부 전화가 오기를. 수술실 문 앞에서 눈물 흘리는 대신, 작고 따뜻한 식탁에서 웃으며 밥을 나눌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 단순한 일상이야말로 삶이 가족에게 내어준 큰 축복임을 이제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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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다행히 며칠간의 치료를 마치고 퇴원했다. 천천히 걷는 걸음, 조심스레 내뱉는 말 한마디, 그 모든 것이 감사다. 그날 새벽의 전화는 삶의 경고였고, 동시에 삶의 의미를 다시 배우는 수업이었다. 피를 나눈 형제자매가 오래도록 건강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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