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정하고 아름다운 가을이다
명작 '월든'을 쓴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자신의 직업을 작가이면서 또 산책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세상의 소음 대신 숲의 숨결을 택했고, 문명의 편리함보다 고요한 자연의 언어를 배웠다. 소로는 매일 느릿느릿 걸으며, 일출과 일몰을 관찰하고 바람 속 소식을 들었고 콩코드의 숲을 걸으며 세상의 진실을 들었다. 바람이 나뭇잎 사이로 흘러가는 소리, 농부의 일하는 모습, 멀리서 들려오는 수탉의 울음은 그에게 글이 되고 문장이었다. 그의 산책은 걷기이고, 깊은 고요를 탐하는 숨결의 순례였다.
소로처럼 아름다운 가을 도심 숲 산책을 했다. 낙엽 위에 쏟아지는 햇살이 잔잔히 흔들리고, 발끝에 밟히는 낙엽이 부드럽게 부서진다. 그 소리마저도 세상에서 가장 온화한 위로처럼 들린다. 하늘은 팽팽하게 맑고, 바람은 이마에 닿으며 투명한 종소리를 낸다. 전나무의 곧은 줄기 위로 낮달이 걸려 있다. 청마 유치환이 '그날 밤 보다 남은 연정의 조각,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마음'이라 읊었던 바로 그 낮달이다. 태양에 가려진 채 희미하게 떠 있지만, 그 뒤편에는 무수한 별빛이 숨어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듯, 진실은 은밀한 자리에서 손짓을 한다.
가을이 깊어간다. 그 깊이는 여름의 숨결이 가라앉고, 물체의 윤곽이 또렷해지는 계절. 나뭇잎이 바람에 스스로를 맡기듯, 내 마음속의 무게를 조금씩 내려놓는다. 나의 생각은 언제나 넘치지만, 산책은 그 넘침을 고요로 덮어준다. 생각이 정리되고, 어제의 혼란이 가라앉는다. 걷는 동안 마음은 비워지고, 그 빈자리를 바람과 햇살이 자리한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사색은 좋은 연결이다. 글은 조급한 마음에서 나오지 않는다. 기다림 속에서, 고요함 속에서 비로소 문장이 태어난다. 박경리 선생이 평생 텃밭을 가꾸며 글을 쓴 이유도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흙을 만지는 손끝에서, 그녀는 생의 근원을 느꼈을 것이다. 글을 쓴다는 건 삶을 경작하는 일이다. 생각을 가꾸고, 감정을 다듬고, 마음의 잡초를 덜어 내는 일이다.
가을 숲을 걸으며 내면의 잡음을 비운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라기보다, 잃어버린 고요를 되찾기 위해서다. 삶은 결국 혼자 해야 하는 일이다. 누군가가 대신 살아줄 수도, 대신 선택해 줄 수도 없다. 삶의 방향은 언제나 나에게로 향해 있다. 그래서 혼자 결정해야 하는 일은 때로는 두렵지만, 또 자유롭다. 바람과 나뭇잎, 그리고 내 발소리만이 동행하는 길 위에서 지금의 나로 충분한가의 물음에 답하는 일은 늘 쉽지 않지만, 가을의 숲은 그 답을 어렴풋이 주는 듯하다. 괜찮다고 다독이듯 잔잔히 미소가 전해진다.
산책길 끝에 이르면 시간의 속도가 달라진다. 세상은 여전히 빠르게 돌아가지만, 내 마음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않는다. 느림의 미학이 때로는 따뜻하게 느껴진다. 지금 이 순간, 가을의 빛을 온전히 느낀다. 겨울로 향하는 문턱에서 이 가을의 온기를 충분히 품어두고 싶다. 내년의 가을도 오겠지만, 올해의 이 가을은 다시 오지 않는다. 이 계절만의 향기, 햇살의 온도, 이 바람의 촉감은 단 한 번뿐이다.
오늘의 발걸음 속에서 한 편의 사유를 완성한다. 그것은 글이 되기도 하고, 침묵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진정한 글쓰기는 기록보다도 감각의 기억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가을의 숲은 생각을 비우되, 마음을 닫지 말라고 하는 듯하다. 숲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낙엽 위로 햇살이 부서지고, 내 안의 사색이 빛을 머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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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하고 아름다운 계절 가을이다. 이토록 고요한 시간 속에서 삶은 본래, 작은 걸음 하나의 진심 속에 깃들어 있다. 가을 숲을 거닐며, 내 안의 월든을 건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