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신선한 맛과 가을 온기
글 쓰는 사람들 여자 다섯 명이 가을 여행을 했다. 같이 간 사람 중 한 사람의 고향 마을이고 경기도의 외곽 조용한 마을에서 민박을 했다. 일기예보에서 첫서리가 내릴지도 모른다는 주말이었다. 도심의 바쁜 공기와 다들 원고 마감의 압박에서 잠시 벗어나, 마음의 온도를 낮추러 가는 길이었다.
차창 밖으로 낯익지 않은 풍경들이 펼쳐졌다. 마을 어귀마다 감나무가 주황빛으로 물들고, 산허리엔 얇은 안개가 감돌았다. 누군가가 "이런 풍경이 문장을 만들어"라고 말했다. 그 말에 모두 웃었지만, 속으로는 다들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글은 모두가 마주한 풍경의 언어이기도 하니까.
민박집은 새로 지은 듯 단정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따뜻한 환영은 뒤뜰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바비큐 준비를 하려는데, 주인이 우리 모두를 텃밭으로 이끌었다. "고추랑 상추, 채소 따다 드세요" 한다.
방금 물을 준 밭은 흙냄새로 가득했다. 종류도 다양한 쌈 채소의 신선한 잎을 손끝으로 만지는 순간, 마치 살아 있는 문장을 쓴 듯한 생생함이 전해졌다. 그곳에는 기교도 장식도 없었다. 땅과 햇살, 그리고 땀의 정성이 있었다.
그날 저녁, 숯불 위로 고기가 익어가며 타닥거릴 때, 그 밭에서 딴 채소를 싸서 크게 한 쌈을 먹었다. 짙은 흙내음과 고기의 향이 어우러져 입안 가득 가을이 퍼졌다. 도시에서는 잊고 살던 신선한 맛이었다.
어쩌면 내가 글 속에서 그렇게 애써 찾는 진심이란 것도 이런 맛과 닮아 있는 건 아닐까. 가공되지 않은 문장, 꾸밈없는 표현, 마음의 흙에서 바로 길어 올린 단어들 말이다.
이튿날 아침, 민박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시골 장터를 찾았다. 길가엔 토란과 무, 갓 수확한 과일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마을 끝자락에서 목장에서 우유를 직접 짜서 만드는 작은 우유 가게를 만났다. 안으로 들어서자 따뜻한 우유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메뉴에는 목장 우유로 만든 요거트, 라테, 그리고 아이스크림이 있었다. 나는 라테 한 잔을 시켰다. 첫 모금은 낯설 만큼 청량했다. 우유의 단맛보다, 풀 냄새 같은 생의 신선함이 먼저 느껴졌다.
입안 가득 차오른 그 자연의 맛은 이내 다른 향들과 어우러져 깊은 여운을 남겼다.
진한 자연의 맛이 전해지고 가공된 단맛이나 인위적인 향보다, 덜 다듬어진 자연의 맛이 훨씬 더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다. 사실 삶도, 글도 마찬가지다. 너무 다듬고 계산하면 오히려 생명력을 잃는다. 가끔은 서툴러도, 거칠어도 좋다. 그것이 살아 있는 글이고, 살아 있는 삶이니까 말이다.
언젠가 누군가 감칠맛이 다섯 번째 미각이라면, 신선함은 여섯 번째 미각이 되어야 한다고. 그 말이 떠올랐다. 도시에서 잊혀진 신선한 맛, 아마 자연이 건네는 가장 순수한 철학일 것이다. 흙에서 나는 냄새, 바람이 머무는 시간, 햇살이 투명하게 내리쬐는 아침 볕에서 비로소 단순함의 귀함을 배운다.
2박의 짧은 머무름이었지만, 그곳에서의 시간은 길고 깊었다. 밤이면 별이 너무 많아, 한참을 아무 말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시에선 보기 힘든 어둠 속의 빛이었다. 별빛이 내려앉은 고요 속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박경리 선생은 이런 곳에서 글을 쓰며 살았겠지요" 그 말이 바람을 타고 모두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박경리의 토지는 문학이기 이전에 삶의 기록이었다.
자연 속에서 밭을 갈고, 흙을 만지고, 노동을 하며 써 내려간 문장들, 그 문장들은 생의 땀냄새와 계절의 숨결로 살아 있었다. 자연을 닮은 글, 자연을 닮은 마음으로.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더 조용한 공간을 찾게 된다.
도시의 화려함보다, 들판의 바람과 새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곳이 좋다. 그곳에서야 비로소 문장은 숨을 고르고, 생각은 뿌리를 내린다. 바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잠시 멈춰 서서, 쉼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새로 배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세상의 소음을 잠시 내려놓고 마음의 밭을 가는 일이다. 그 밭에 어떤 씨앗을 심을지는 각자의 몫이지만, 그 씨앗이 싹을 틔우려면 흙과 햇살, 그리고 기다림이 필요하다. 도시에서는 잊고 사는 그 기다림의 시간, 그것이야말로 글을 쓰는 이에게는 소중한 양분이다.
돌아오는 길, 차 안의 공기가 달라져 있었다. 서로 말은 많지 않았지만, 모두가 마음속에 흙냄새 한 줌쯤은 품고 있을 것이다. 그 냄새는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다.
쉬 사라질까 봐, 마음속에 조용히 담아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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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로 돌아와 그때의 공기와 냄새, 빛의 결이 다시 떠오른다. 그곳에서 느낀 신선한 맛, 자연의 온기, 그리고 사람의 다정함이 문장 속으로 천천히 스며든다.
가을 한가운데에서 만난 그 텃밭은 여전히 마음 한편에서 푸르게 자라고 있다. 그리고 자연처럼, 느리게. 그러나 진실하게. 그것이 가을에게 배운 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