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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어가는 난계사의 가을

가을빛처럼 삶의 여운처럼

by 현월안



가을이 깊어갈 무렵 친정 형제들과 긴 연휴기간에 난계사를 찾았다. 산자락을 따라 난계사로 향하는 길목마다 붉고 노란빛들, 그곳에도 가을이 예쁘게 빛나고 있었다. 형형색색으로 물들었던 단풍은 마지막 잎새의 시간을 살고 있었다. 바람이 한 번 불 때마다 낙엽이 바닥을 스치며 떨어졌다. 마치 한 생의 마지막 인사를 건네듯, 조용히, 그러나 단정하게 계절의 끝자락을 보여 주었다.



길가에 선 은행나무는 금빛을 흘리고, 그 아래를 걷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는 마치 국악의 리듬처럼 느리게 울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도, 흙 위를 걷는 발소리도, 모두 악보 한 장의 음표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듯했다.


난계사는 우리나라 3대 악성 중 한 사람 난계 박연의 사당이다. 조선의 음악정신이 고스란히 숨 쉬는 그곳은, 소리의 근원을 품은 성스러운 곳이다. 경사진 언덕 위, 앞면 세 칸의 맞배지붕은 세월의 비바람을 견디며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왔다. 문 하나하나, 기둥 하나하나에 깃든 세월의 결이 아름답다.



사당으로 오르는 길은 세 구역으로 나뉜다. 먼저 외삼문으로 향하는 바깥공간은 침묵의 길이다. 세속의 소음을 잠시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는 통로다. 외삼문과 내삼문 사이에는 단정한 정원이 펼쳐진다.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 낙엽이 내려앉은 돌계단, 그리고 정원 한가운데 놓인 석등 하나가 고요를 지킨다. 마지막으로, 한 단 높게 자리한 그곳에는 박연의 영정이 있다. 그 앞에 서면 인간의 예술이란 본래 자연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는 것임을 알게 되고, 가을빛이 다시 일깨워주었다.



사당 뒤편으로는 난계의 묘소가 있다. 묘역을 감싸는 소나무들이 잔잔한 울림으로 노래를 건넨다.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마저도 한 곡의 피리소리처럼 들린다.
그 아래 난계국악박물관이 자리한다. 국악의 오랜 숨결이 고요히 잠든 곳, 거기엔 소리의 철학이 있다.
소리는 사람의 마음이 흔들릴 때 태어나는 파문이다. 박연은 그 파문 속에서 인간의 내면을 다스리는 길을 보았다. 그의 음악은 화려하지 않으면서 절제되어 있었다. 가을빛처럼,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조화였다.



난계사로 향하는 언덕길에는 전국 최초의 체류형 국악타운인 국악체험촌이 있다. 그곳에서는 장구의 북편이 울리고, 해금의 현이 떨리고, 피리의 숨결이 바람을 타고 흐른다. 누군가는 손끝으로 소리를 만들고, 누군가는 귀로 그것을 듣는다. 그 소리들이 서로 부딪히고, 어우러지며, 사라진다. 그러나 사라짐 속에서도 잔향은 오래 남는다. 마치 가을의 빛처럼, 삶의 여운처럼.



지난 긴 연휴, 고향에서 형제자매들과 함께 난계사를 찾았을 때, 평생을 함께 자란 형제자매지만, 어느덧 각자의 삶을 살아가며 중년의 세월을 넘기고 있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그날, 가을 햇살이 포근하게 내리던 난계사의 잔디밭 위에서 우리 형제들은 잠시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서로의 웃음이 낙엽 위로 부서지고, 따뜻한 햇살이 서로의 얼굴을 감쌌다. 왠지 모르게 포근한 감정이 가을빛과 함께 쏟아져 내렸다. 난계사의 가을이 참 예뻤다. 가을은 따스한 온기와 서로에게 머무는 예술 같았다.



사람의 인생도 계절과 닮았다. 봄에는 희망으로 피어나고, 여름에는 뜨겁게 살아내고, 가을에는 비로소 자신을 돌아본다. 그리고 겨울이 오면 조용히 묵상한다.
가을의 아름다움은 그 비움에서 비롯된다. 가득 채우려 하지 않고, 흘려보내는 법을 배우는 계절.
나뭇잎은 떨어지며 땅으로 돌아가고, 그 땅은 다시 내년의 봄을 위한 준비가 된다. 삶 또한 그러하다. 놓을 줄 알아야 다시 채울 수 있다.



그날 난계사의 가을은 더 깊고 고요했다. 그곳에서 우리 형제들은 찬찬히 둘러보았다. 멀리서 아이들이 낙엽을 던지며 웃는 소리, 바람에 실려 오는 피리의 선율, 그리고 사당을 감싸는 고요한 온기. 모든 소리가 합쳐져 하나의 음악이 되었다. 그 음악은 내 안의 소음을 잠재우고, 마음속 깊은 곳의 평화를 일깨워 주는 듯했다. 삶이란 어쩌면,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에서 울리는 소리를 듣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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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계사의 가을은 그렇게, 소리를 흘리고, 빛을 거두고, 마음을 남겼다. 난계사의 가을은 귀로 듣고, 가슴으로 느끼는 시간이었다. 낙엽이 떨어지는 그 순간에도, 국악의 소리가 여전히 가을처럼 음악처럼 남아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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