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어른보다 먼저 아름다움을 본다
이른 저녁을 먹고 남편과 동네 오목공원을 걸었다. 서두르지 않는 발걸음, 오늘만큼은 시간마저 느긋하게 흘러가는 듯했다. 나뭇잎은 가을빛으로 무르익어 있었고, 길가에 앉은 이들의 표정에는 평온이 묻어났다. 사람들은 가족과, 연인과 친구와, 또 혼자만의 고요와 함께 가을을 품고 있었다. 그 풍경만으로도 마음이 포근해지는 저녁이었다.
앞에서 길을 걷던 노란 패딩을 입은 여섯 살쯤 보이는 여자아이가 걸음을 멈췄다. 마치 세상이 잠시 정지된 듯, 아이의 눈이 하늘을 가리켰다. "와, 엄마, 하늘 너무 예쁘다" 그 목소리는 투명하고 맑게 저녁 공기 속에서 울렸다. 그 아이의 엄마도 아이와 똑같이 감탄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게, 예쁘네."
참 이상하다. 같은 하늘인데, 아이가 먼저 본다. 어른보다 먼저 아름다움을 알아챈다. 우리 부부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하늘을 다시 올려다본다. 노을빛 아래 아이의 얼굴이 잠깐 비치고, 그 순간 우리도 아이처럼 하늘을 올려다보게 된다. 그렇게 하늘은 반짝이고 있었다.
삶의 경이는 거창한 계획 속에 있지 않다. 그저 골목을 돌다 문득 다가오는 감탄, 느닷없이 보는 미소, 마음이 부드러워져 가는 순간 속에 숨어 있다. 어린아이가 보여준 맑음은 넓은 하늘을 품고 있었다.
해가 살포시 내려앉은 저녁이 되면 사람은 순해진다. 순한 노을빛이 세상과 나를 천천히 감싼다. 두 팔 활짝 벌린 엄마를 향해 달려가는 아이의 세상은 무엇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날아가는 중이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것은 저토록 단순한 순간 속에 들어있다. 우리 부부는 웃으며 말했다. "그 녀석 참 감수성 좋네"
어느 시인은 하늘의 별보다 하루살이 풀벌레의 시간을 더 사랑한다고 했다. 지금은 그 뜻을 조금은 알 것 같다. 길고 영원한 감동보다, 지금 순간에 피어나는 짧은 웃음이 삶을 살게 한다는 뜻일 것이다. 가을 하늘 아래 한 아이가 멈춰 서서 외친 한마디가 별빛보다 따뜻했고, 가을을 풍경과 맞닿아서 더 아름답게 보였다.
요즘 가을이 예쁘다. 바람은 부드럽고, 단풍은 마음을 흔들고, 노을은 사람을 순하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글을 쓰려고 하면 자꾸만 가을을 쓰게 된다. 가을에 푹 빠져 가을 예찬을 하게 된다.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꾹꾹 눌러 담아도 가을이 다 담기지 않는다. 때로는 너무 벅찬 감동이어도 말과 글이 닿지 않는다. 그 감탄이 머무는 영역, 가슴으로 느끼는 선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가을은 내게 묻는듯하다. 오늘은 얼마나 여유 있게 걸었느냐고. 얼마나 멈추었느냐고. 얼마나 깊이 바라보았느냐고. 세상은 쉴 새 없이 나를 재촉하지만, 가을은 그 반대로 속삭인다. 조금 더 천천히 살아도 괜찮다고. 지금 이 순간을 품는 것이 삶의 본질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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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노을 아래에서 삶의 속도를 다시 배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천천히 걷는 일, 무심히 지나치던 것에 감탄하는 일, 그리고 누군가의 작은 목소리에서 큰 진심을 발견하는 일. 그렇게 하루가 저문다. 잔잔한 느낌을 가지고 따스한 가을 온기로, 가슴 깊은 곳을 보듬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