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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문턱 입동이다

한 해를 돌아보면 늘 부족하고 늘 미완이다

by 현월안




오늘이 입동(立冬)이다. 이름 그대로 겨울이 들어선다는 뜻이지만, 올해의 입동은 유난히 다정하다. 아침부터 유리창에 스미는 햇살은 포근하고, 오후엔 서울 기온이 20도 가까이 올라가 늦가을의 품 안에서 머뭇거렸다. 마치 자연이 마지막 인사를 건네듯이 조금만 더 머물러도 괜찮다고 속삭이는 듯하다. 계절은 어느새 경계를 넘고, 변화를 따라 겨울의 길목으로 들어선다.



입동이 되면 공기에 묘한 향이 있다. 그 차가움이 싫지 않은 알싸한 찬기운이다. 햇살 속에 차가움이 섞여 있고, 바람의 결이 한결 단단해진다. 코끝에 닿는 냄새가 바뀌고 발걸음이 느려진다. 거리의 나뭇잎들은 더 이상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조용히 땅으로 내려앉는다. 사람의 마음도 그와 닮았다. 들떠 있던 기운이 가라앉고, 바깥을 향하던 시선이 조금씩 안으로 향한다. 바쁘게 달려오던 시간의 속도가 느려지고 문득 멈춰 서서 나를 돌아보게 된다.



입동이 되면 마음의 계절이 바뀐다. 여름엔 세상이 너무 밝고 분주해서 놓치던 것들이, 입동이 오면 다시 보인다. 차가운 바람이 마음의 창을 닦아주듯, 흐릿하게 묻어 있던 감정이 또렷이 드러난다. 미처 다 하지 못한 말과 전하지 못한 마음과 그리고 잊고 있던 고마움이 기억이 난다. 그래서 입동즈음에는 마음 밖에 흩어놓았던 일들을 서서히 거두어들이고, 고마웠던 사람들에게 조용히 인사를 건네는 때이다.



옛사람들은 입동을 기운을 보충하는 날로 여겼다. 추운 계절을 버티기 위해 따뜻한 음식으로 몸을 달래고, 한 해의 피로를 풀었다. 생강차 한 잔, 유자차의 달콤한 향을 곁에 두고 마셨다. 마음을 덥히는 위로다. 따뜻함은 마음의 여유라는 걸, 해마다 겨울이 다가오면 새삼 알게 된다.



입동이 지나면 하루하루는 조금 다르게 흐른다. 해가 짧아지고 어둠이 길어지면서, 집 안의 불빛이 한결 따뜻해 보인다. 마른 나뭇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걸 보면 모든 것들이 내 안에서 천천히 침잠하고 한 해의 마지막 장을 준비한다. 계절은 흘러가지만 그 안에서 여전히 관계를 이어가고 마음을 다듬는다. 입동즈음엔 그래서 끝이고 또 시작이다.



올해의 입동이 유난히 따뜻한 건, 아마도 자연이 사람에게 조금의 여유를 건네는 배려일지 모른다. 아직은 늦가을을 다 보내지 않았고 한 번 더 숨을 고르고, 마음을 정돈하라고 하는 듯하다. 하지만 곧 찬바람이 찾아오고, 겨울의 매서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거라는 것을 안다. 그 사실을 알기에 오늘의 따뜻함은 더욱 귀하고, 순간의 햇살은 더욱 소중하다.



한 해를 돌아보면 늘 부족하고, 늘 미완이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계절이 바뀌듯 마음도 늘 변화하며, 그 변화를 통해 사람은 조금씩 성숙해진다. 중요한 것은 따뜻한 마음으로 그 시간을 통과하는 일이다. 감사할 줄 알고 또 미안할 줄 알고, 고마운 이들을 떠올릴 줄 안다면 잘 살아낸 한 해일 것이다.



입동의 바람이 스치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따뜻함을 찾는다. 그것이 온돌의 열기이든 따뜻한 차 한 잔이든, 혹은 누군가의 다정한 말 한마디이든 말이다. 사람을 지탱하는 것은 사람의 온기다. 차가운 계절일수록 인간적인 따뜻함을 찾게 된다. 그래서 입동이 되면 인간다움이 다시 살아나는 절기이기도 하다.



이제 곧 찬 기운이 본격적으로 찾아올 것이다. 겨울은 차갑지만, 그 속에는 생명이 쉬어가는 시간이 숨어 있다. 나무는 잎을 떨구지만 뿌리는 더 깊어지고, 사람은 집 안에 머물지만 마음은 더 넓어진다. 입동은 그 깊어짐의 계절을 여는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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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동인 오늘 햇살이 길게 늘어진 오후에 문득, 삶이란 계절의 순환과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 순환 속에서 조금씩 단단해지고, 조금씩 따뜻해진다. 그러므로 입동의 문턱에서 올겨울엔 조금 더 따뜻한 마음이기를, 내 마음도 새로이 채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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