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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사람과 죽은 이가 함께 머무는 자리

슬픔 속에서도 밥을 먹는다

by 현월안




얼마 전 지인의 모친상에 조문을 갔다. 상복을 입은 유족들이 조용히 인사하며 문상객을 맞고 있었다. 향냄새가 은은하게 퍼진 장례식장은 언제나 그렇듯, 말보다 침묵이 더 많은 공간이다. 조문을 마치고 식당으로 향했다. 긴 상 위에는 육개장과 밥, 몇 가지 반찬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육개장이 늦은 저녁 허기를 자극했다.



식사를 마치고 장례식장을 나서는데 함께 간 일행이 웃으며 말했다. 밥 한 공기 더 먹고 싶었는데, 더 달라고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참았다고 했다. 그 말에 모두가 조용히 웃었다.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난 때였으니 다들 배가 고팠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한 말속에는 조심스러운 감정이 배어 있었다. 누군가의 슬픔 앞에서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것이 조금은 미안한 일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나 역시 젊은 시절에는 장례식장에서 제대로 밥 한 숟가락 뜨지 못했다. 음료 한 잔, 과일 한쪽 정도가 고작이었다. 괜히 밥을 먹는다는 게 죄송스러웠다.
고인을 떠나보낸 이들이 잠시 숨 돌리는 그 자리에서, 밥을 먹는다는 것이 어딘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내가 스스로 예의라고 마음속에 만들어 두고는, 그렇게 젊은 날의 나는 슬픔 앞에서 늘 배고픈 채로 자리를 떴다.



그런데 어느 날, 부모님 두 분을 다 여의고 상주가 되는 상황이 되었다. 부모님 두 분을 차례로 보내드리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 조문객들이 밥을 맛있게 먹는 모습이 그렇게 큰 위로가 될 줄은 몰랐다. 누군가의 젓가락질, 조용한 수저 소리, 국물 삼키는 소리가 그날따라 그렇게 따뜻하게 들렸고, 육개장 한 그릇이라도 든든하게 드시고 가기를 마음속으로 바랬다. 밥 한 그릇을 남김없이 비워내는 진심이 고맙고 감사했다.



장례식장의 밥상은 떠난 이를 위한 마지막 정성이고, 남은 이들을 위한 조용한 다정함이다. 슬픔의 자리에 밥이 놓이는 것은, 아마도 인간이 먹으며 정을 내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삶은 밥을 나누는 일의 연속이다. 누군가의 슬픔 앞에 가서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그 슬픔을 함께 지키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제는 장례식장에 가면 밥을 먹는다. 그리고 가능하면 남기지 않는다. 음식에 담긴 마음을 느끼고, 상위에 놓인 음식을 감사히 먹는다. 그것이 상주에게 전할 수 있는 무언의 위로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사람은 살아가며 수많은 예의를 배운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알게 되는 건, 예의는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이다. 형식과 절차를 넘어, 상대의 마음에 닿는 예의 말이다. 때로 진심에서 나오는 한마디의 위로와 맛있게 비워내는 밥이 진심일 수 있다.



삶에서 슬픔은 멈추지 않는다. 어떤 죽음이 찾아와도, 사람은 여전히 밥을 먹고, 또 숨을 쉬고 내일을 맞는다.
장례식장에서 밥을 나누는 것은 슬픔을 함께 나누는 일이고,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의식이다.



부모님을 떠나보내고 나서부터 더 이상 장례식장에서 밥 먹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그 자리는 슬픔과 삶이 교차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눈물을 훔치고, 누군가는 젓가락을 든다. 그 두 가지 모두, 인간이 인간으로서 견디는 방식이다. 밥을 먹으며 슬픔을 삼키고, 슬픔 속에서도 또 밥을 먹는다.


살다 보면, 어떤 위로는 말로 전해지지 않는다.
때로는 손잡는 온기나, 어깨를 두드리는 힘보다
더 조용하고 깊은 위로가 있다. 그건 바로 함께 앉아 음식을 나누는 일이다. 슬픔의 자리에서조차 밥을 나눌 수 있을 건, 서로를 사랑으로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장례식장의 밥상을 마주할 때마다 마음속으로 기도를 한다. 그건 식사의 예의이고, 떠난 이와 남은 이 모두에게 건네는 작은 기도이다. 삶은 서로 그 어떤 연결로 이어져있다. 먹고 또 나누고, 다시 살아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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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밥 한 공기를 더 먹고 싶었다던 함께 간 지인의 말이 따뜻하게 들렸다. 그건 허기보다, 삶을 향한 예의 바른 그리움이었을지도 모른다. 밥 한 공기의 위로가 그렇게 깊고, 다정한 줄 비로소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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