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툴 가완디' 교양 철학
인간은 죽음이라는 필연 앞에 선 존재다. 그러나 모두는 단순한 진실을 외면한다. 의학의 발전이 생명을 연장해 주고, 언젠가 반드시 닥칠 마지막 장면을 이야기하는 것을 미룬다. 생의 끝은 늘 멀리 있다고 믿으며, 끝내는 피할 수 없는 것마저 치료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게 인간은 오래 사는 법은 익혔지만, 존엄하게 마무리하는 법은 잊어버렸다.
작가는 노쇠한 생이 겪는 진실을 차분히 해부한다. 병원 침대에 묶여 인공호흡기에 의존하는 노인들과, 혈관 속을 오가는 바늘과 약물이 만들어 낸 연명의 환상들, 삶을 지키기 위해 택한 선택들이 오히려 삶의 감각을 빼앗아 간다. 수술대 밖에서 들려오는 가족의 목소리는 "할 수 있는 건 다 해 주세요" 그러나 그 말 뒤에 숨은 공포와, 사랑이 두려움으로 바뀌는 순간을 목격한다. 죽음이 두려워 치료에 매달리지만, 그 치료 속에서 모두가 잃는 것은 삶이다.
노년은 하루아침에 찾아오지 않는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다가온다. 어느 날 문득 혼자서 양말을 신기 어려워지고, 좋아하던 책의 문장들이 흐릿해지고, 다정한 이름들이 혀끝에서 맴돌다가 사라진다. 이때 가장 잃고 싶지 않은 것은 생명 그 자체가 아닌, 자율성과 존엄, 그리고 느리지만 분명한 나만의 리듬이다. 한편에 놓인 탁자 위 작은 화분과, 따뜻한 빛이 비치는 창가와, 내가 고른 컵에 담긴 차 한 잔, 그것이 인간이 끝까지 지키고 싶은 세상의 모양이라고 말한다.
요양원의 규칙 속에 갇힌 이들이 잃는 것은 살아 있음을 잃는다. 그래서 한 요양원 의사는 개와 고양이, 새들과 아이들을 들여보냈다. 삶이란 예측할 수 없는 사건으로 구성된다는 본질을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서였다. 그 작은 변화를 통해 노인들은 다시 웃었다. 약물은 줄고, 사망률은 낮아졌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다시 오늘을 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죽음 앞에서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더 많은 시간인가, 아니면 의미 있는 시간인가. 사랑하는 이를 오래 붙잡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가, 아니면 그가 원하는 마지막을 존중하는 것이 사랑인가. 완화의료는 남은 시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선택이다. 피하지 않고, 담담하게, 마지막 장면을 함께 디자인하는 용기다.
작가의 아버지가 마지막을 맞이하던 날, 그는 손주들의 사진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고통과 기계음이 가득한 병실이었지만, 그 짧은 순간만큼은 삶이 다시 반짝였다. 죽음은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지 못한다. 마지막까지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사랑할 수 있다면,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죽음은 끝나는 지점이지만, 준비되지 않은 죽음은 패배다. 언젠가 반드시 다가올 끝을 부끄러움 없이 마주할 때, 진정으로 살아 있는 존재가 된다.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보다 끝날 때까지 '나'로서 존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모두에게 삶의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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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당신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떠나고 싶은가.
죽음을 생각하는 일은 삶을 사랑하는 일이다. 우리가 떠나기 전에 배워야 할 마지막 지혜는, 바로 조용한 진실 속에 숨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