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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을 구부려 앉은 이들

오늘은 강화 오일장에 가는 날이다

by 현월안




오늘은 강화 장에 가는 날이다. 대형 마트에는 없는 게 없지만 재래시장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있다. 그래서 가끔, 남편과 함께 강화 전통시장을 찾는다. 서울에서 강화까지 이런저런 이야기하다 보면 도착하는 적당한 거리다. 늦은 가을에 가면 보물찾기 하듯 살 것이 많다. 그곳에 가면 기억의 시간이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시골에서 자란 탓일까. 시장 사이로 스며드는 늦가을 햇살과 바람결에 섞여 오는 젓갈 냄새, 그리고 상인들의 한 톤 높게 섞인 웃음소리 마저 정겹다.



시장에 들어서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늘 그렇듯 싱싱한 푸성귀들이다. 군데군데마다 가을 결실의 결이 다르다. 빨간 고추, 인삼, 강화 순무와 배추를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사람을 기다린다. 늦은 가을에 풍기는 진한 젓갈냄새와 그 사이사이에 시장 사람들의 인심이 있고, 시끌시끌하고 떠들썩한 생기가 있다.



늙은 호박을 보고 그만 발걸음이 멈추었다. 노랗게 익어 펑퍼짐하게 누운 호박. 어디선가 본 듯한, 한참을 바라보게 되는 익숙한 생김새다. 호박 앞에 잠시 앉아 여러 개의 호박 중에 눈으로 찜을 해 두었다. 커피 두 잔정도의 값으로 늙은 호박 두 덩이를 샀다.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든다. 봄날 캄캄한 씨앗이 흙 속에서 눈을 뜨고, 여름 장맛비에 쓰러지고 또 일어나며 천둥을 삼켜냈을 넝쿨의 시간들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꿋꿋이 해를 향해 나아가던 그 생명력이다. 그 험한 시간을 견디며 익은 열매를 이렇게 평범한 좌판 위에서 나를 만나게 되다니, 그저 반갑고 고맙다.



좌판을 펴고 앉은 할머니가 직접 농사지었다는 말과 그 옆에 조금은 서툴고 부족해 보이는 아들이 말없이 할머니 곁에 앉아있다. 호박을 팔던 할머니의 손이 내 앞에 다가왔다. 돈을 치르며 본 깊게 파인 손등, 햇볕에 그을린 주름이 마치 오래된 삶의 굴곡 같았다. 그 손에서 묘한 삶이 느껴졌다. 하루의 무게를 이고, 계절의 변화를 몸으로 견디며 살아온 세월의 손. 호박 넝쿨이 흙을 붙잡고 자라났듯, 그분의 삶 또한 땅을 붙잡고 버텨왔을 것이다.



무릎을 구부려 앉은 사람, 그 낮은 자세로 삶을 이어가는 사람. 호박을 다루는 그 손끝에서 나는 오래된 인내의 정을 보았다. 좌판 위의 호박은 어느새 할머니의 무릎을 닮아 있었다. 그 낮은 자세로 구부렸다가 다시 펴야 하는 수많은 반복이, 따뜻한 정이고 품이 넓은 넉넉한 인심이었다.



늙은 호박을 차에 싣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늙은 호박이 무게가 묵직했다. 문득, 종갓집 종부였던 친정 엄마가 떠올랐다. 이제는 세상에 안 계시지만, 엄마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호박죽의 향기는 아직도 내 기억 속에서 따뜻하게 자리하고 있다. 호박을 갈고 끓이다가 찹쌀가루를 조금 넣고, 소금 한 꼬집을 넣는 그 섬세한 동작들이 하나의 의식처럼 이어졌다. 엄마가 호박죽 만들 때마다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호박죽은 너무 달아도 안되고 단 맛이 적당히 맞아야 맛있어" 그 한마디에는 인생의 맛에 대한 철학이 담겨 있었다. 단맛보다 깊은 적당한 단맛은 시간의 지혜가 만들어내는 것이고, 그건 설탕이 아니라 정성의 시간에서 나온다는 걸 일러주는 것이다.



호박 한 덩이를 가지고 저녁에 호박죽을 끓였다. 호박 껍질을 벗기며, 그 속살을 썰 때마다 엄마 손이 내 손을 덮는 듯했다. 냄비에 물을 붓고 불을 올리고, 달그락 소리와 함께 주방에서는 따뜻한 온기가 돌았다. 호박이 익어가면서 서서히 퍼지는 달큼한 냄새, 그 냄새 속에서 엄마의 부엌을 본다.



그 옛날 장작불 위에 걸린 솥단지, 옆에서 김이 서리는 모습, 그리고 그 앞에서 조용히 국자를 젓던 엄마의 뒷모습, 늙은 호박죽은 기억의 음식이고 늦가을부터 겨울까지 즐겨 먹던 그 옛날 주식이었다. 봄의 씨앗에서 시작해 여름의 폭풍을 견디고, 가을의 햇살을 모아 겨울의 따뜻한 한 끼로 완성되는 호박의 일생이다.



완성된 호박죽을 그릇에 담아 가족들과 엄마 이야기를 하며 맛있게 먹었다. 부드럽고, 적당히 달달하고 묘하게 깊은 맛. 혀끝에서 느껴지는 건 그 뒤에 숨은 누군가의 시간이다. 밭에서부터 부엌까지, 그리고 내 입속까지 이어져 온 그 긴 여정의 맛이고 몸을 낮춰야 보이는 것들이다. 개미와 풀꽃, 그리고 늙은 호박과 같은 낮은 생명들... 그 겸허한 존재들이 있기에 세상은 균형을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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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그렇게, 무릎을 굽힌 사람들 덕분에 세상이 따뜻해진다. 그리고 그 온기는 다시 누군가의 삶 속으로, 또 마음속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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