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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책을 만나 펼치면

한 시대의 숨결을 머금은 살아 숨 쉬는 이야기

by 현월안




책은 한 시대의 숨결을 머금은 살아 숨 쉬는 이야기다. 시간이 좀 지난 책을 찾아 헌책방을 뒤지는 일은 잃어버린 시간을 다시 불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무심히 검색창에 제목을 입력해 찾은 책 한 권이 낡은 표지를 드러낼 때, 마음속에 묘한 설렘이 인다. 먼 길을 돌아온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말이다.



가끔 동네에 헌책방을 찾는다. 반듯한 표지가 아니고 오래된 냄새가 풍기는 책 속에서 또 다른 순간을 만난다. 오래된 책을 손에 쥐면, 그 안에 스민 세월의 냄새가 묘하게 따뜻하게 느껴진다.



시간이 좀 지난 책이지만 괜찮은 책을 만나서 펼치면, 그 안에서 삶의 조각들이 불쑥 고개를 든다. 책갈피 속 마른 단풍잎 한 장과 늦가을 어느 오후의 누군가의 생각이 붉게 번지던 순간의 흔적이다. 빛바랜 페이지 사이에 끼어든 하루의 자국이고 깊은 여름밤, 불면의 시간을 함께 지새운 작은 의미의 시간이다. 낯선 필체로 그어진 밑줄 하나에 오래 시선이 머문다. 그렇게 헌책은 과거의 시간을 가만히 되살려 내게 들려준다.



내가 사는 목동에는 헌 책방 하나가 있다. 그곳은 널찍한 공간이고 쾌적하고 고급스럽게 잘 운영되는 곳이다. 예전에 헌 책방이면 어둡고 비좁은 이미지와는 다르다. 넓은 공간이고 나무 향이 감도는 인테리어, 은은한 조명이 책을 감싸고 있다. 한쪽에는 커피를 내리는 바리스타가 있어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 있고, 사람들은 자유롭게 책을 꺼내 읽는다. 커피 향과 종이 냄새가 섞여 흐르는 공기 속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시간에 잠긴다. 때로는 학생들이 많이 찾고 또 중년으로. 보이는 이들이, 한 자리에 앉아 책장을 넘긴다.



그곳은 시간이 남을 때 찾아가는 나의 놀이터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놀이터가 있을까 싶다. 낡은 책들 사이에서 새로운 문장을 만나고, 잊었던 생각을 되찾는다. 그곳에서는 세상이 조금 느리게 흐른다. 책을 고르고 커피를 마시며, 창밖으로 빛이 스며드는 것을 여유 있게 바라보는 일은 그 순간의 작고 은은한 쉼이다.



시간이 좀 지난 책의 향은 시간의 냄새이고, 사람의 냄새이며 삶의 냄새다. 수많은 손이 넘기고, 수많은 눈이 읽은 문장들이다. 그 손끝의 온기와 시선의 여운이 책장 사이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오랜 세월을 견디며 부드럽게 익은 가을 열매처럼, 헌책은 시간이 만든 향기를 품고 있다.



책을 읽는 것은 나를 만나는 일이다. 누군가가 밑줄을 그은 문장 위에서 내 마음의 밑줄을 다시 긋는다. 낯선 필체가 남긴 흔적 속에서 나의 감정을 발견한다. 세월이 겹겹이 쌓인 종이 위에, 내가 또 한 겹의 시간을 덧입힌다. 그래서 헌책은 지난 시간을 건너온 조용한 시간여행이다.



삶은 헌책과 닮았다. 때로는 구겨지고 때로는 낡아가지만, 그 자국 속에 깊이가 들어있다. 반짝이는 순간만을 쫓던 젊은 날에는 몰랐던 맛 같은 오래된 책처럼, 여물어 순해지는 삶이 얼마나 고요하고 따뜻한지를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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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그 헌책방엘 간다. 누군가의 시간이 묻은 책 한 권을 골라 들고, 커피 한 잔을 옆에 두고 앉는다. 낡은 종이 냄새를 맡으며, 천천히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간다. 세상은 여전히 바쁘고 복잡하지만, 그 시간만큼은 멈춰 있다. 조금 시간이 지난 책 한 권의 페이지를 조심스레 넘긴다. 그건 내가 찾던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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