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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문우들과 나누는 망년회

사람이 머무는 자리에서 글이 되고 삶이 된다

by 현월안




글을 오래 쓰다 보면 곁에 사람들이 있다. 문장 속에서 잠깐 비켜 나와도 여전히 곁을 지키는 인연들, 설명하지 않아도 마음이 닿는 사람들이다. 이제는 삶을 나란히 걸어오며 서로를 알아보는 존재가 되었다. 눈빛만 스쳐도 마음결을 읽어주는 이들, 한 문장 속 쉼표처럼 서로에게 조용한 숨을 내어주는 이들이 있어서 쉬지 않고 글을 쓰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처음에 우리 크루는 열다섯 명이었다. 글로 마음을 다듬던 사람들이 어느새 멀리 이사 가고, 삶의 방향이 달라지고 하나둘씩 자리를 비웠다. 이제는 찐 열 명이 되었다. 인원이 줄고 마음의 밀도는 더 깊어졌다. 서로가 서로의 문장이 되어주는 연결들, 말보다 침묵이 편안한 사람들, 마음을 기댈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 매년 두 번에 걸쳐서 동인지를 발행하고 각각 여러 매체의 칼럼을 쓰고 또 강의를 하고 다들 글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다들 바쁘게 지내는 사람들이라서 우리 크루의 망년회는 조금 특별하다. 모두가 바쁘게 달리는 12월이 아닌, 가을 끝자락 11월에 우리끼리 조촐하게 점심을 나누며 망년회를 한다. 한 해 동안 얽힌 마음밭을 살피고, 혹시라도 무심히 흘린 말들이 누가 되진 않았는지 조심스레 되짚어 본다. 서로를 어루만지는 시간, 글보다 더 따뜻한 문장이 사람 속에서 피어나는 시간이다.



무엇보다 가장 재밌는 건 망년회 선물 나누기를 한다. 일인당 오만 원에 해당되는 선물을 각자 준비한다. 상품권은 안되고, 현금으로 대체해서도 안된다. 그리고 반드시 이천 자 이상 쓴 편지가 들어 있어야 한다. 편지 주제는 누구를 한 사람 지칭을 해서 써도 되고 또 열사람 모두의 이야기여도 괜찮다.



여러 규정이 있지만 누구 하나 싫다는 내색을 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선물 뽑기를 하면 묘하게 설렘이 있다. 제비 뽑기를 해서 선물을 열어보는 순간, 포장지 사이로 흘러나오는 건 깊은 위로이고 또 편지가 주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온기다. 글을 쓰는 사람들답게 각자의 언어로 마음을 꿰매어 넣은 이천 자의 이야기들. 한 문장마다 체온이 실려 있고, 끝까지 다 읽고 나면 어느새 마음이 포근히 데워지고 눈시울을 적신다.



내가 마련 한 망년회 선물로는 기능성 베개를 준비했다. 금액은 규정보다 두 배를 더 넘겼지만, 우리 집 베개를 모두 바꾸며 미리 준비해 둔 선물이라서 즐거운 마음으로 들고 갔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깊은 잠이 아닐까 생각하며, 깊은 숙면이 누군가의 새로운 문장을 더 부드럽게 열어주기를 바랐다.



모임 장소에 들어서니 모두의 얼굴이 밝았다. 안부 인사가 따뜻한 위로가 되고, 고운 말이 또 마음이 되는 사람들. 글을 오래 쓰고 삶을 오래 다듬어서인지 문우들은 늘 한 톤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조심히 말한다. 서둘러 말하지 않고, 누군가의 문장 사이에 고요하고 부드러움을 본능적으로 아는 사람들이다. 아마도 자기 내면을 끝없이 들여다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일 것이다. 글을 쓰는 일은 자신을 다스리는 일이고, 그리고 차분해지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연결일 것이다.



내가 뽑은 선물은 가을과 겨울의 색이 고르게 배합된 예쁜 스카프였다. 색감이 맘에 들었다. 스카프를 준비 한 문우가 왠지 나를 떠올렸고 그 예감이 맞았다는 문우의 웃음이 먼저 떠올랐다. 스카프를 목에 두르자마자 포근하게 마음까지 감싸지는 것 같았다. 올겨울은 따뜻한 스카프를 두르고 겨울을 날 것이다. 바람이 차가워지는 날이면, 그 문우의 편지와 마음이 함께 기억 날 것이다.



생각해 보면, 글을 쓰는 일은 혼자 하는 작업이지만 또 인간 세상과 연결이다. 서로 주고받는 영감, 느낌, 생각이 사람을 통해 더 깊어지고 단단해진다.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 되어 문장을 맑게 해 주고, 서로의 그림자를 비추어 마음의 방향을 잡아준다. 오래 만나온 사랑하는 문우들 때문에 글 쓰는 길도 덜 외롭다. 그렇게 서로의 글 속에서 천천히 닮아간다.



문우들을 만나는 그 시간이 참 괜찮다. 앞으로도 건강하게, 오래도록 곁에서, 서로의 생각을 놀이터 삼아 함께 놀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바랄 게 없다. 서로의 문장 속에서 겨울을 건너고, 서로의 마음속에서 봄을 맞는 일. 인연이 깊어지면 계절도 함께 쌓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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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망년회는 또 하나의 문장으로 남았다. 삶은 마음에 맞는 사람들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문우들과 또 한 번 확인했다. 사람이 머무는 자리에서 글이 되고, 글이 머무는 자리에서 삶이 깊어진다. 그 중심에 소중한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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